소리마당 오피니언
과학정책, 4차 산업혁명에 휩쓸려선 안 된다
wonkyung
과학정책, 4차 산업혁명에 휩쓸려선 안 된다
조기 대선 가능성이 커지면서 대선 주자 간의 정책 논쟁이 한창이다. 이번에야말로 후보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가 아니라 정책을 보고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토론 방송에 귀를 기울여 보지만, 대선 주자들에게 과학에 대해 견해를 묻는 질문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아마도 과학이란 비정치적 영역이어서 국민이 원하는 정치적 지도자를 가려내기 위한 문항에 포함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현재 우리 사회가 당면한 엄청난 문제를 풀어갈 사람을 찾는 것과 과학 정책은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과학에 대한 생각이야말로 후보가 우리 사회에 대한 어떤 미래 비전을 갖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것인데, 선거란 다름 아닌 미래를 위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녹색경제, 창조경제…널뛰기 하는 과학정책 언제까지]
그동안 우리 연구자들은 과학에 대한 확고한 비전이 없이 정부가 연구개발비를 집행할 때 연구 현장이 어떻게 되는지를 생생하게 경험해왔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연구비를 받으려면 “녹색”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가야 한다는 얘기를 농담반 진담반으로 했는데, 현 정부에서는 내용이 불분명한 “창조경제”라는 슬로건을 과학 정책에도 무작정 적용하면서 기초연구에서도 경제적 가치를 내세워야 했다. 최근 들어 대선 주자들 간에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의가 한창인 걸 들으면서 연구자들은 다음 정부에서 연구비를 받으려면 너나 할 거 없이 4차 산업혁명의 핵심기술 관련 연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어쩌나 하고 우려한다.
이렇게 정부가 바뀔 때마다 널뛰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창의성이 생명인 연구자들이 자신의 연구를 계속 해나가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우리나라는 과학 선진국의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채 주저앉는 처지가 될 것이 자명하다.
연구자 주도 기초연구 지원을 확대해달라는 국회 청원 운동이 일어난 것은 바로 이런 위기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1500명에 달하는 연구자들의 서명을 이끌어낸 것은 그만큼 위기에 대한 공감이 컸기 때문이라 하겠다 (http://scienceon.hani.co.kr/446573). 지난달 국회에서 청원이 채택되기는 했지만 (http://www.ibric.org/myboard/read.php?Board=isori&id=34334&sflag=1&Page=1), 실제 정부 정책과 예산 수립에 반영하지 않으면 실효성이 없으니, 차기 정부를 이끌 대선 후보들의 과학에 대한 생각을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경제개발 목적형 지원정책에서 창의적 연구는 ’풍요 속 빈곤’]
우리나라는 정부 총 예산의 5%를 연구개발비로 쓰고 있다. 이는 선진국들보다도 높은 수준으로 잘 사용한다면 과학기술 강국을 만들 수 있는 규모이다. 5년 단위로 과학기술 정책을 집대성하는 ‘과학기술 기본계획’과 ‘기초연구 진흥계획’에는 온갖 화려한 수사가 넘쳐난다. 하지만, 실제 연구개발비의 사용 내역을 들여다보면 매우 기형적이다.
총 연구개발비 19.1조원 중에 연구 과제를 지원하는 순수연구개발비는 6.8조원뿐으로 연구개발 집중도가 매우 낮다 (그림1 왼쪽). 게다가 6.8조원 중 연구자 주도의 창의적 기초연구에 지원되는 건 1.1조원뿐이고, 5.7조원은 정부 주도의 국책사업에 투자되고 있다. 즉, 자신의 독창적 연구를 하려고 하면 어느 분야의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려 있는 1.1조원을 놓고 이공계 교수 41000명과 연구원들이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니 연구 현장, 특히 기초연구를 주로 하는 대학에서는 연구비 가뭄에 시달릴 수밖에 없고, 국책 사업에서 연구비를 받기 위해 동분서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림 1. 정부 연구개발비의 구조조정 방향
( ‘5년 후’ 그림은 필자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연구개발비 구성 모형)
지금과 같은 상황이 만들어진 것은 “선택과 집중”이란 전략으로 국책 사업에 대한 투자를 우선시하는 연구 정책에 따라 정부 부처별로 국책 사업 확대를 경쟁적으로 추진해 온 데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더욱 근본적으로는 정부의 연구개발비 투자가 경제개발 목적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연구개발비의 경제사회 목적별 투자현황에 대한 OECD자료를 보면 국가별로 매우 다른 특징을 나타내지만, 우리나라처럼 정부 연구비의 50% 이상이 경제개발 목적에 투자되는 나라는 선진국 중에는 없다 (그림 2).
그림 2. 경제사회 목적별 정부 연구개발비 투자 현황
( ‘5년 후’ 그림은 필자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목적별 투자 구성 모형)
이런 패턴은 기업이 성숙하기 이전에 국가가 경제발전을 주도하는 시기의 개발도상국형이다. 우리나라가 진정 선도형 국가를 지향한다면 하루빨리 이 패턴에서 벗어나, 정부의 연구개발투자는 보건환경, 대학발전, 비목적 연구 등 보다 공공적 목적에 투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중, 어떤 목적에 우선을 둘 것인지에 대해 우리나라에 맞는 투자 비중을 설정하고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가는 것이 바로 미래를 설계하는 일이고 정부가 할 일이라 생각한다. 연구개발비의 구조 조정 또한 이러한 방향 설정에 따라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림 1 오른쪽).
[정부 주도 국책연구에 치우친 연구비 구조 조정해야]
이러한 인식 변화가 없이 정부만 바뀐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어느 정부라고 새로 벌이고 싶은 국책사업이 없겠는가? 기존 사업은 기존 사업대로 갑자기 그만둘 수 없고, 새로운 사업을 벌이는 것도 포기할 수 없고, 국책사업 수주 경쟁으로 비대해진 정부 부처와 연구관리 기관의 쌓이고 쌓인 비효율을 개혁할 의지도 없다면, 연구자들이 독창적 연구보다는 각종 사업에 기웃거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기초연구 현장의 붕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정부는 2017년에 1600억 원, 2018년에 2400억 원을 증액하여 연구자 주도의 기초연구를 1.5조 원까지 늘리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였지만, 근본적으로 구조를 바꾸겠다는 계획이 없이 기초연구비만 일회성으로 증액하는 처방으로 큰 변화를 기대할 수 없음 또한 자명하다.
연구자 주도의 창의적 연구를 살아나게 하려면, 대대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이는 연구개발비 투자의 우선 순위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 정부 주도의 국책사업과 연구자 주도의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연구의 적절한 비율을 산출하고, 그에 맞게 예산을 조정하고, 연구개발비 집행을 효율화하는 과감한 구조 조정을 요하는 일이다.
예산 조정의 구체적 목표가 제시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화려한 수사로 가득 찬 계획을 세우더라도 헛된 공약에 그칠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과학 발전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기초연구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확고한 생각이 바탕이 될 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기초연구란 본질적으로 특정한 응용을 염두에 두지 않고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연구이지만, 그렇게 얻은 연구 결과들이 모여 진보를 이루어내는 것이 과학이다.
과학의 진보는 창의성과 다양성을 중시하는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선택과 집중을 전략으로 하는 연구 정책이나 과학을 산업화를 위한 기술의 전 단계로 취급하며 연구 성과를 즉각적인 경제 가치로 환산하여 평가하는 환경에서는 창의적 기초연구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혁신적인 기술 개발 또한 불가능하다. 선택과 집중은 빠르게 추격하기 위한 전략이지 미래를 선도하는 전략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4차 산업혁명의 대표로 인식되는 알파고를 만든 하사비스가 밝혔듯이 인공지능 설계에 이용된 기본 개념들이 뇌 안에서 일어나는 정보 처리과정에 대한 기초연구의 결과에서 비롯되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학적 진보 없이 혁신적 기술 개발이 일어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으며, 우리나라가 경제개발 목적을 우선한 국책 사업 중심의 연구개발비 투자에 치중해 온 것이 역설적으로 경제 발전을 선도할 혁신적 기술 개발을 저해한 요인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과학정책, 5차 산업혁명의 선도 국가를 목표로 미래를 준비하자]
대선 후보들의 본격적인 선거 운동이 시작되면서 정책 이슈에 대한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지난 대선 때 “경제 민주화”가 핵심 키워드였다면, 이번 선거에서는 “4차 산업혁명”이 부상할 가능성이 엿보인다.
“4차 산업혁명”의 물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가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임이 분명하지만, 과학 정책까지 거기에 휩쓸려서는 안 될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을 정치적 슬로건으로 내세우는 데에 급급하지 않고 우리나라가 왜 4차 산업혁명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추격하기 바쁜지에 대한 통찰력을 가진 후보가 나오기를 고대한다.
그런 후보라면, 연구자 주도의 창의적인 연구를 활성화하여 연구 분야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이 언젠가 미지의 분야로부터 나올 5차 산업혁명에서 선도국가가 될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일임을 이해할 것이다. 정치적 이슈에 휘둘리지 않고 과학이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정부가 할 일이 무엇인지 고민할 것이고, 정부 주도의 국책연구에 치우친 연구비 지원 구조를 과감히 개혁하고 다양한 분야의 기초연구 투자를 확대하는 실질적인 개선책을 제시할 것이다.
앞으로 올 대선 토론에서 여러 후보들이 경제사회 정책뿐 아니라, 과학 정책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 글은 사이언스온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scienceon.hani.co.kr/49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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