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가의 최고 권력이 최태민이라는 사이비 교주와 그 딸인 최순실과 공모해 국가를 사적으로 농단한 죄, 그것이 최순실 사태와 박근혜 탄핵의 핵심이다. 개인의 신앙 혹은 신념이라는 수준에서, 단 그 신앙과 신념이 타인 혹은 사회에 큰 피해가 되지 않을 때, 우리는 한 개인의 종교가 사이비라는 이유로 그를 차별하거나 고소할 수 없다1. 그것이 우리가 개인 자격으로 창조과학을 열심히 믿는 신앙인 과학자를 차별해선 안 되는 이유다. 누누이 말해왔지만, 창조과학이 문제가 될 때는, 그 유치한 신념이 공적차원의 영역, 예를 들어 교과서나 공직으로 넘어올 때다2. 박근혜가 온 우주가 자신을 돕는다고 믿건 말건, 그것이 개인의 신앙 차원에 머문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문제는 그가 대통령으로 그런 신념을 사이비 교주와 함께 국정 운영에 도입할 때다. 한국사회의 상식은 최소한 그런 구별을 가능케 할 만큼 건강하다3.
언젠가 말했듯, 사이비에 빠져드는 행태에 대해서만큼은, 한국의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이 크게 다르지 않다. 친일파에 저항해온 세력과 386으로 대변되는 한국 진보진영 또한 근거에 기대지 않은 교조화된 신념으로 사회에 해악을 끼친 죄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예를 들어, 유사역사학을 신봉하는 역사학자들이 진보진영에 가득하고, 영구기관 같은 사이비과학을 통해 공동체를 만들려 했던 진보진영의 시도는 물론, 사주명리학이나 정신분석이론처럼 전혀 검증되지 않은 인문학적 이론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정책을 만들려는 진보적 지식인들의 존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일일이 거론하기도 힘들만큼, 한국은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의 구분 없이, 사회에 해악이 될 만한 사이비 종교, 이론, 과학 등이 판치는 공간이다4.
드루킹은 한국사회의 진보진영에 몸담고,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헌신했던 인물로 보인다. 그런 인물이 개인적 욕망과 공적 차원의 판단을 착각하고 주화입마한 사건, 아마도 그것이 드루킹 사건의 본질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 진보진영의 투사를 자처했던 인물이 천착했던 신념을 조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는 '송하비결', '자미두수', '티벳 사자의 서' 같은 예언서를 중심으로 사주명리학에 정치를 끼얹는 기술을 독창적으로 만들었다. 그런 유치한 시도들이 개인의 신념으로 남아, 혼자 댓글이나 다는 온라인 투사로 남았으면 괜찮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를 따르는 수 천명의 신도들이 '경제적 공진화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모여 조직적인 사이비 종교의 전 단계를 밟았다는 데 있다. 그 어떤 제지도 합리적 의심도 통하지 않았다. 사이비 종교는 그렇게 작동한다.
어디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누구도 답할 수 없다. 누군가는 분명 한국사회에 깊게 자리하고 있는 무속신앙을 거론하고 싶을지 모른다. 누군가는 조선에 기원한 인문학적 전통이 너무 강해 여전히 과학적 합리성이 한국사회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지 모른다5. 그렇다면 답은 더 많은 과학, 더 과학적인 한국을 만드는 것이라고, 쉽게 이야기하려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과학은, 아니 과학을 단지 합리적 이성의 영역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비슷한 타락에 빠지는 모습을 보인다. 스스로를 과학적 회의주의자라고 외치던 1990년대 한국사회의 비판적 합리주의자들은 과학을 하나의 교조적 신앙으로 만들며 극우적 정치운동 세력으로 타락해갔다. 그들 중 일부는 누군가 듣보잡이라고 불렀던 극우 미학자의 인터넷 매체에서 논문표절이나 검수하며 추한 삶을 살고 있다6. 결국 과학적 합리성도, 과학적 회의주의도 이 사이비가 판치는 한국사회를 치료하는 대안은 아니다.
완벽한 암치료제가 없는 것처럼, 완벽한 사이비 치료제도 없다. 암에 걸려 허약해진 몸처럼, 사이비에 허약해진 사회를 한 가지 치료제로 건강하게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물학자들이 세상을 구원한 가장 큰 기여가 소아마비 백신과 같은 예방약임을 기억할 필요는 있다. 적어도 우리 다음 세대가 최순실 같은, 드루킹 같은 이들의 사이비 이론에 농단당하지 않게 만들 방법은 있다. 그것은 치료제가 아닌 백신과 비슷한 방식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그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 이 사회에서 그다지 대접도 받지 못하는 과학에 기대야 한다. 그 과학은, 아인슈타인이나 다윈처럼 천재 과학자 한 두명을 조명해 그들의 과학적 결과물에 감탄하고 마는 과학이 아니어야 한다. 그 과학은, 국가의 경제적 발전만을 위해 과학을 기술의 장식품쯤으로 여기고 마는 그런 모습은 아니어야 한다. 그 과학은, 교양서적과 유명과학자들의 강연만을 중심으로 과학자가 될 생각도 없는 아이들에게 스펙쌓기의 대안으로 제공되는 도구는 아니어야 한다.
그 과학은, 입과 두뇌보다는 손과 몸으로 우리 삶에 침투해 들어오는 모습이어야 한다. 누구나 과학적 발견의 과정을 손과 몸으로 이해하고, 누구나 일생의 한 순간에 자신만의 과학적 발견을 경험해 볼 수 있는 사회, 과학적 삶의 양식은 바로 그런 사회에 자연스럽게 퍼지는 건강한 백신이다. 또 다른 드루킹과 최순실이 한국사회엔 아주 많다. 그들 모두를 제거하고 사회를 전진시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늦더라도 천천히 확실하게, 우리는 사회를 사이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백신을 개발해야 한다. 과학적 삶의 양식이라는 백신을7.
 김우재, 급진적 생물학자
※주석 1. 그러니 실은 주류 기독교의 이단이라는 딱지도, 무종교인 입장에선 황당한 일이다.
2. 이에 관해선 필자의 졸고 “한겨레 [야! 한국사회] 넘어오지 마라. 2017.9.11”을 참고할 것.
3. 오래 걸렸지만 말이다. 이에 관해서는 필자의 졸고 “한겨레 [야! 한국사회] 샤머니즘 국가. 2015.11.30”을 참고할 것.
4. 필자의 졸고, “한겨레 [야! 한국사회] 독단적 회의주의. 2013.5.6”을 참고할 것.
5. 말과활, 김우재, “텅빈 지대. 한국사회 진보진영의 지형도와 버널 사분면” http://gajangjari.net/wp-content/uploads/2014/03/말과활3호-김우재.pdf
6. 한국적 과학적 회의주의의 몰락에 대해서는 필자의 블로그 heterosis.net/의 여러 글들을 검색할 것.
7. 더 자세한 논증은 필자의 졸고 “김우재, 과학적 삶의 양식에 대한 소고. 과학동아. 2016.9.9”을 참고할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