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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일 많은 대학원생의 피땀눈물] 한국어는 생각보다 어렵다
Bio통신원(변서현)
(글쓰는 사람 옆에는 역시 커피가 필요하다. https://edubirdie.com/blog/illustration-essay)
최근에 후배가 쓰는 과제 계획서의 한국어 교정을 도와준 적이 있었다. 나름 연구실 안에서 한국어로 글을 쓰는 스킬이 있는 편이라(고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진 것이 맞다.) 종종 연구실에서 써야 하는 한국어 글쓰기를 맡아 할 때가 있다. 교수님과 함께 써서 내야 하는 연구과제 계획서나, 대학의 동물실험윤리위원회에 매년 제출해야 하는 동물실험계획서, 많은 학생들이 신청하는 학생 장학금 지원서, 그리고 외국에서 수입해오는 LMO에 대한 검역신고서까지, 생각보다 대학원생들이 마주하는 ‘한국어로 된 글’은 많은 편이다. 이 글들의 대부분은 과학적 내용을 바탕으로 하는 학술적 글쓰기이면서, 같은 분야의 연구자가 아닌 다른 분야 또는 비전공자를 독자로 상정하고 작성해야 하는 글이다. 그래서인지 한국어 글쓰기에서 어려움을 느끼는 대학원생들을 많이 보고 있다. 문제가 뭘까. 무엇이 글 쓰는 대학원생을 괴롭히고 있는 걸까.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지만, 대학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되었을 때부터 “나는 0개 국어를 하는 사람이야.”라는 말을 종종 했다. 분명히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인데, 조사를 제외한 너무 많은 단어를 자연스럽게 영어로 하고 있고 상응하는 한국어 단어가 생각나지 않기 때문이다. 음식을 소분해서 나눠줄 때 aliquot(소분하다, 같은 양으로 나누어 첨가하다)해서 준다고 말하거나, 아이스 라떼에 들어있던 얼음이 다 녹아 커피 맛이 하나도 안 날 때 dilution(희석)되었다고 말한다. 연구실에 외국인이 여럿 있고, 랩미팅도 영어로 하고, 실험에 관련된 대화를 할 때에도 영어를 섞어 하다 보니 습관적으로 영어와 한국어를 적당히 섞어 대화를 하고 있다. 직업병인 것 같기도 한 이런 일상이 가장 쉽게 마주하는 문제일 것이다.
최근에 후배의 과제 계획서 수정을 도와주면서 느낀 두번째 문제는 아직 전문 용어의 한국어 번역이 학문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면역학 분야에서Follicular Helper T cell은 T세포의 한 종류로, 항체의 생성과 B세포의 분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세포는 아직 번역된 한국어 이름이 없다. ‘follicular’라는 단어가 아직 면역학 분야에서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흔히 접하는 영한사전에서는 이 단어는 ‘여포’ 또는 ‘모낭’으로 번역된다. 포괄적으로 보면 ‘주머니’라고도 번역할 수 있지만, 전문용어로서는 아직까지 난소 안에 있는 ‘여포’로만 받아들여지고 있다. (중고등학교 생물 과목에 나오는 ‘여포자극호르몬’의 그 ‘여포’가 맞다.) Follicular Helper T cell이 발견된 지 아직 10년이 안되었으니, 번역이 안된 것이 이해는 간다. 하지만 계획서를 쓰며 영어로 되어 있던 전문용어를 번역하다가 멈칫, 잠시 당황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필자가 주로 연구하는 regulatory T cell의 경우에는 2000년대에 발견되어 지금은 ‘조절T세포’라는 통용되는 한국어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한국어로 된 글을 쓰면서 또 느끼는 것은, ‘전공자’를 대상으로 한 ‘한국어’ 글이 전무하다시피 하다는 것이다. 같은 분야의 연구자들끼리 토론하기 위한 글은 전부 영어로 되어있는 논문들이고, 우리 분야의 글을 한국어로 만나기 위해서는 교수님과 선배들이 썼던 과제 제안서나 대중을 위한 과학교양서적, 과학분야의 언론 기사들을 읽어야만 한다. 과제 제안서는 사실상 연구실에서 내려오는 것과 교수님이 전달해주시는 것뿐이라 그 내용과 양이 턱없이 부족하다. 다른 연구실의 내용은 공동연구를 하지 않는 이상 찾아보기가 너무 어렵다. 반면 대중을 위한 교양서나 언론기사는 비전공자와 시민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많은 내용을 축소하고 생략해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지 오히려 헷갈릴 때도 있다. 그러다 보니 직접 글을 쓸 때에 아주 어설픈 번역투의 한국어가 등장하거나, 한국어와 영어의 서로 다른 글쓰기 흐름을 모두 무시한 형태의 글이 나오기도 한다. 한글이 읽어 지기는 할 지언정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글이 태어나는 것이다. 글을 잘 쓰는 방법의 첫번째는 글을 많이 읽어보는 것이라고 어렸을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는데, 정작 많이 읽을 글 자체가 없는 상황이다.
아예 한국어로 쓰는 과제 계획서가 아니라 영어로 된 글을 번역해야 할 때에는 더 어렵다. 외국인 학생 또는 연구원이 한국어로 제출해야 하는 동물실험계획서, 박사학위논문 초록 등을 한국인 동료가 번역해주어야 하는 경우가 매년 발생하는데, 한국어 어휘와 글쓰기에 나름 자신이 있었던 사람조차도 번역이라는 벽 앞에서는 고개가 숙여진다. 외국인 동료가 부탁한 학위논문 제목 하나를 번역하는데, 직역해보니 한국어에서 전혀 쓰이지 않는 표현이어서 이걸 어떻게 써야 익숙한 느낌이 나올지 한참을 고민한 적도 있었다. 전문 번역가가 아니다 보니 부탁을 받아 번역할 글을 펼쳐 놓고 있으면서도 내가 화면에 두드리고 있는 이 문장이 맞는 문장인지 몰라 스스로를 불신하기도 한다. 이처럼 학생들이 한국어로 글을 쓰면서 벽에 부딪힐 때 대응하는 방법이 있긴 하다. 영어로 된 용어를 번역해야 할 때는 대학원생의 신, 구글께서 만드신 번역기를 쓴다. 영어로 된 문장이나 단어를 번역기를 이용해 한국어로 바꾼 뒤, 이상한 부분들을 바꾼다. 이 방법은 영어로 된 글을 써야 할 때도 비슷하게 통용된다. 한국어로 먼저 글을 쓴 뒤, 번역기가 한국어를 영어로 바꾸게 한 뒤 문법이나 맥락이 이상한 부분을 고치는 식이다. 전문용어가 포함된 글을 매끄럽게 만들기 위한 여러 팁들도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제대로 된 글을 쓰기는 어렵다. 어딘가 어색하고 이상한 단어와 문장들이 보이는 데 이걸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마지막에 등장하고 만다. 이럴 때는 연구실 안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갑자기 토론이 시작된다. “이 부분에 들어가면 좋을 단어는 뭘까?”, “이 단어는 한국어로 어떻게 바꿔야 해?” 와 같은 질문을 연구실 구성원들의 집단지성으로 해결한다. 전문적인 첨삭은 받지 못하고, 동료들과 교수님들의 도움으로 마무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하지만 대학이나 학과에서 대학원생의 한국어 글쓰기를 위한 교육이나 전문적인 첨삭을 따로 진행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학부생 때에는 글쓰기 과목이 필수로 지정되어 있어 수강했는데 대학원생이 써야 하는 글과는 거리가 있는 글들을 연습했었다. 학부 졸업학기 때 ‘영어논문작성’이라는 과목을 수강할 때는 영어로 과학적 글쓰기를 하는 방법을 배웠다. 하지만 대학원에 와서는 영어든 한국어든 과학적 글쓰기를 하는 방법에 대해 배우지 못했다. 여러 대학의 사례를 찾아보니 역시나 학부생 또는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적 ‘영어’ 글쓰기에 대한 강좌는 많이 열려 있는 편이지만 ‘한국어’ 글쓰기 강좌는 찾아보지 못했다. 대학원생이 한국어 글쓰기에 익숙해지고 능력을 향상하는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학부 때 처음 전공 수업을 들으면서 교수님들이 조사를 제외한 모든 단어를 영어로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교과서를 한국어로 번역해 놓은 책을 보면서, ‘내가 봐도 이런 말 쓰기 싫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원생이 된 지금은 필자조차도 조사를 제외한 모든 단어를 영어로 말하며 매일 영어로 된 글을 읽는다. 공인 영어시험을 보는데 읽기 부분만 유난히 점수가 높았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대학원생은 한국어로 된 글도 읽고 쓸 수 있어야 한다. 영어가 무서운 것은 맞지만 한국어라고 무섭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한국어를 자유롭게 쓸 수 있게 교육하고 더 나아가 영어와 한국어를 쉽게 오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행동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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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으로 이미 출판된 지식이 아닌, 지식이 만들어지는 연구의 과정을 현장의 연구자이자 대학원생인 필자가 경험을 토대로 소개합니다. 연구실에서 있었던 일, 연구자들 간의 대화 등을 소재로 한국의 연구실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작은 의견을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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