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 실험대 실화냐........ MIT Gangnam Style, https://www.youtube.com/watch?v=lJtHNEDnrnY)
몇 년 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을 때 미국 MIT의 한인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MIT Gangnam Style’이라는 커버 뮤직비디오가 유튜브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당시 노래가 끝나고 마지막 부분에서 보인 장소는 누가 봐도 생명과학 계열 실험실인 곳이었는데, 그곳 구석에서 주인공이 실험대 위의 물건들을 밀어 놓고 엎드려 쪽잠을 자는 장면으로 등장했었다. 더 이상 밀어 놓을 자리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물건들이 많았는데, 사실 주변 실험대들에서 많이 보던 장면들이라 나름 익숙하기도 했던 것 같다. (물론 실험대에서 잠을 자면 안된다!) 지저분한 책상을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하는 필자는 그 장면을 보고 ‘MIT 실험실도 정신없는 건 똑같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저기서 어떻게 실험을 하지?’라고 기겁을 했었다.
어느 공간이나 그렇지만 실험실도 주기적으로 청소를 한다. 특히 생명과학 실험실은 Wet Lab이기 때문에 청소를 하지 않으면 바로 티가 난다. 집안일을 하면 티가 안 나지만 한번 안 하면 바로 티가 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보통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청소를 하는데, 바닥을 청소기로 밀고, 물걸레질을 하고, 실험폐기물 쓰레기통을 비우고, 그걸 내다버리는 일 등이 있다. 원래 실험폐기물도 건물 청소 담당자 분들이 처리해 주셨는데, 최근 들어 그 양이 너무 많고 분리배출 규정이 엄격해지면서 각 실험실에서 해결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일주일에 마대자루보다 큰 비닐 봉지가 몇 개씩 가득 차는 곳이 실험실이다.) 전기 영동을 하거나 동물 해부를 하는 공간, 저울과 각종 공용기기들이 있는 공간들도 실험대 위를 알코올로 모두 닦아 먼지를 없앤다. 세포배양실은 특히 오염을 주의해야 해서 더 각별히 청소한다. 많은 실험실들은 아예 세포배양실 전용 실내화를 구비해서 청결을 유지하는 편이다. 우리 연구실은 1~2주에 한 번씩 바닥을 물 대신 70% 알코올로 닦는다. 그래서 코로나19 유행 초기 알코올을 구할 수 없어 청소에 애를 먹기도 했다. 세포배양실에는 생물안전캐비넷도 있어서, 모두 알코올로 닦고 기계가 빨아들인 배지 폐액들도 처리해주어야 한다. 냉장고와 인큐베이터의 손잡이, 원심분리기 안쪽까지도 모두 알코올을 뿌려 닦는다. 대부분의 연구실들이 청소하는 루틴은 모두 비슷할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연구실 사람들이 구역과 역할을 분담하는데, 어디를 가나 그렇듯 가끔 말도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다. 우리 연구실은 월요일 아침 주간미팅을 마치고 바로 청소를 하기 때문에 사라지는 사람이 적지만, 어떤 연구실은 금요일 아침에 청소를 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나오지 않아 청소에 구멍이 생기는 일이 종종 있다고 들었다. 여러 연구실에서 청소시간에 지각하거나 안 나오는 경우 자체적으로 벌금 제도를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분담한 구역들이 있는데 한쪽에 구멍이 나면, 무려 2주치의 쓰레기와 먼지가 쌓이는 꼴이라 생각보다 아주 드라마틱한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이와 다르게 실험실의 개인공간인 실험대는 각자의 성향들이 눈에 띄게 드러나는 부분들이다. 어떤 사람은 공용 공간은 철저하게 정리하고 자리를 뜨는 반면 개인 공간은 정체 모를 종이들로 가득 쌓여 있고, 어떤 사람은 작고 네모난 그 공간 안에서 물건들을 조금씩 밀어가면서 실험할 자리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반면 다른 사람은 장갑 상자와 종이 타올, 팁통 등이 모두 각을 맞춰 서 있어야 한다. 실험대 위에 쓰레기가 올려지는 꼴을 절대 못 보는 사람도 있고, 자기 물건들이 어디에 있는지 항상 파악해야 하는 사람도 있다. ‘무질서 속의 질서’를 추구하는 사람과 ‘질서 그 자체’가 필요한 사람, 크게 두 가지 분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성향이 다른 두 사람은 사실 서로를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각자의 공간을 존중해주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 (교수님들의 소싯적 성향에 따라 연구실의 깔끔한 정도가 아예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어떤 교수님은 지저분한 실험대를 절대 두고 보지 못하시고, 어떤 교수님은 본인의 책상이 엔트로피의 최고점을 찍기도 한다.)
실험실에서 개인 별로 배정받는 냉장고 칸들도 실험대와 마찬가지다. 비슷한 연차인데 빈 공간의 차이가 너무 심해서 살펴보면 한 사람은 연구실에 처음 발을 디딘 그 순간부터 만든 샘플들을 모두 보관하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다시 쓸 일이 없다고 판단한 샘플들을 그 즉시 폐기하고 있다. 전자의 경우 나중에 가면 내 냉장고에 무엇이 있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수준이 되고, 후자는 필요 없을 줄 알았던 샘플이 필요해 찾아보는데 온데간데 없어 당황스러운 상황이 생긴다. 만약 이 두 사람이 같은 칸을 써야 한다면? 꽤 오랜 기간의 잔소리 또는 대화가 오고 가고 마는 것이다. 이러는 과정에서 결국 중도를 찾아 합의를 보고, 서로의 장단점을 흡수할 때도 많다.
한 달 전쯤 우리 연구실은 공간 구성을 바꿔야 해서 대대적인 청소를 했다. 아예 하루 날을 잡고 그 모든 실험을 미뤄둔 채 연구실 사람들이 다 같이 목장갑을 꼈다. ‘질서 그 자체’를 꽤나 추구하는 랩장인 필자는 미리 정해 놓은 청소 날짜의 며칠 전부터 어떤 가구를 어디에 둘지, 어떤 장비를 또 어디에 둬야 할지 머리를 싸맸다. 5년 넘게 건드리지 않았던 공간을 해체하고 다시 구상해야 했고,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공간을 두고 볼 수 없어 수납과 동선도 최적화를 해야 했기 때문에 거의 실험실 판 <신박한 정리>(연예인들의 집을 정리해주는 tvN의 예능 방송.)를 한편 만드는 느낌이었다. 수 년간 쌓여 있던 데스크탑 전원 케이블과 작동이 안되지만 그냥 두었던 십수 개의 전자제품들을 꼬인 선을 모두 풀어가며 정리했고, 공용 냉장고 안에 있는 졸업한지 몇 년씩 된 선배들의 샘플을 분류했다. Expire date가 어마어마하게 지난, 연구실과 세월을 함께한 시약들은 과감하게 폐기물로 보냈다. 이곳 저곳 흩어져 있던 여러 키트들도 한 군데로 모았고, 무엇인지도 모른 채 가득 차 있는 서랍들을 모두 꺼내 비우고 다시 채워 넣었다. 공용 공간의 수납장은 라벨링도 다시 하고, 비슷한 목적을 가진 물건들을 한 군데에 모았다. 특히 실험실의 구석에 있는 저온실 문을 열었던 순간은 마치 지옥문을 연 것 같았다. 평소에도 답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 있던 물건들을 모두 꺼내고 보니 “이게 왜 거기서 나와?” 싶은 것들이 한가득이었다. 이 날 연구실에서 밖으로 내보낸 폐기물 봉투는 적어도 몇 주치는 되었던 것 같다. 몸은 정말 힘들었지만, 대청소를 하고 나니 실험을 하면서 물건을 찾는데 허비해야 했던 시간도 줄어들고 동선이 깔끔해지면서 꽤 만족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이제 졸업할 때까지 이 정도 수준의 대청소는 안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 날 우리 연구실은 정말 오랜만에 회식을 했다.)
‘청소를 안 하면 새로운 우주가 탄생한다.’ 모 배달플랫폼이 만든 문구에 쓰여 있던 장난 섞인 표어다. 청소를 오랫동안 하지 않으면 그곳이 집이든 연구실이든 마치 팽창하는 우주처럼 새로운 무질서가 탄생한다. 물론 그 안에도 규칙적으로 공전하는 행성처럼 나름의 질서는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무질서한 우주를 제대로 발견하는 순간은 청소를 하기 위해 문을 활짝 열어버린 그 순간이 아닐까. 방법은 모두 다르겠지만, 연구를 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공간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적어도 가끔씩은 청소를 할 필요가 있다고 감히 이야기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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