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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의 망원경; Telescope in my brain] 내가 원하는 연구를 찾아서(2), 학회장 가는 길
Bio통신원(김민환)
내 가방에는 대한민국 여권이 없었다.
처음 타 본 스위스 취리히에서 출발한 유럽 야간열차가 밤새 달렸고, 침대칸에서 잠을 청했던 승객들은 조금은 피곤한, 잠이 덜 깬 듯한 모습들이었다. 창밖에 아침햇살이 가득한 아침에 기차는 잠시 멈추었으며, 군인처럼 보이는 제복 입은 3-4명이 기차에 올라 사람들의 신분을 검색하는 것처럼 보였다. 알고 보니, 그들은 크로아티아 국경에서 일하는 국경 경찰이었으며, 기차로 국경을 지나는 사람들의 여권을 검사하는 절차였었다. 독일과 프랑스가 맞닿은 스위스 소도시에서 생활을 시작한 나는 솅겐 협정 (Schengen agreement [1])을 통해서, 프랑스와 독일을 여권 없이, 이곳이 정말 국가와 국가 사이의 국경인가 싶을 정도로 자유로이, 옆 나라 동네 슈퍼에 빵 사러 왔다 갔다 할 수 있음에 잠시 젖어 대한민국의 여권을 장롱 속 가방에 넣어 놓고, 막연히 여권 가져가야 하지 않나 생각하다, 가져오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크로아티아는 솅겐 협정 국가에는 속해 있었지만, 실행이 보류된 상태란 것을 난 알리 없었다.
두 번째 포닥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고, 실험실 지도 교수의 고향인 크로아티아에서 자신의 부모님 소유 성 (Castle, 물론 어릴 적 생각할 수 있는 유럽의 성과는 외관상 많이 달랐지만)에서 유럽에 있는 같은 연구 분야 사람들을 초청한 조그만 학회 가는 길이었다. 소위 학회 주체 실험실처럼 되어서, 파워포인트로 발표할 수 있도록, 빔 프로젝터와 관련된 장비를 실험실 사람들이 나누어서 챙겨가야 했고, 나 역시 맡은 짐을 가지고 아르헨티나 친구와 야간열차에 같이 탔었다. 크로아티아 국경 경찰에게 부시 부실한 얼굴로, 내 지갑에서 꺼낸 미국에서 지낼 때 가지고 있던 신분증과 스위스에서 받은 신분증을 꺼내는 내 모습은 그들을 참 어이없게 만들었고 나에게 하차를 요구했다. 기차 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나는 내가 맡은 학회 물건을 아르헨티나 출신 동료에게 전달하고 내 짐만을 챙겨서 국경 경찰과 기차 밖으로 함께 내려야 했다. 그 기차는 계속 목적지를 향해 가야 하니까. 그나마 인상이 괜찮았던 한 경찰이 저쪽 보이는 플랫폼에서 반대 방향으로 기차를 타면 다시 왔던 스위스 취리히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물에 빠지면, 물에 빠진 것이 부끄러워서 살려달라는 말을 잘 못한다고 했던가, 나 역시 참 난감한 생각들과 실험실 동료들이 넌 왜 학회에 오지 못했니 하면서 수군수군 거리는 듯한 모습들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정말 넋을 잃은 사람처럼 국경 경찰이 가르쳐 준 반대편 기차에 올라타 한참을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시 집까지 돌아갔다 오면 꼬박 이틀을 보낼 테고, 하루 일찍 가는 중이었지만, 2박 3일 정도의 학회 일정에 반 이상 날리고 돌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하는 생각과, 돌아가서 텅 빈 실험실에 나 혼자 앉아 무엇을 하나 하는 그런 생각만 들었다. 더 바보 같았던 내 모습은 기차를 타고 지금 가고 있는 이곳의 나라 이름조차 모른다는 것. 내가 아는 건 바쁘게 실험하던 중 어쨌든 이 유럽 야간열차를 타면, 크로아티아의 수도인 자그레브 (Zagreb)으로 데려다줄 거라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택시를 타고 학회가 열리는 성으로 가면 된다는 일정만이 머리에 있었다.
그래서 우선 돌아가기 전에 이곳이 어디인가부터 알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다음 도시에서 내렸다. 그리고 전화 없이 아이팟 (인터넷이 가능한 곳에서 아내와 문자를 주고 받을 수 있으니)을 가지고 생활했던 그당시 나는 유럽여행 다니는 젊은이들이 거쳐가는 장소 같은 카페에 들어가서 지도를 한 장 받았고 무료 인터넷이 가능한 곳에서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다. 여권이 없어서 국경을 넘지 못했다고.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슬로베니아 (Slovenia)의 수도인 류블랴나 (Ljubljana)이며, 다른 방법이 없으니 다음 기차를 타고 돌아가겠다고. 풀이 죽어 말하는 나에게 아내는 여권을 가져다 주겠다고 오지 말고 기다리라고 말했지만, 3살 아이를 데리고 야간열차를 타고 여권 전해주기 위해 이곳까지 온다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 아닌가? 학회가 뭐라고. 그런 대화 중 아내는 좋은 아이디어를 냈고, 망연 자실 그냥 돌아오지 말라고 위로해 주었다.
그 아이디어는 아내가 한 시간 기차를 타고 취리히 기차역으로 가서 어제 저녁에 내가 탔던 같은 일정의 기차가 오늘 저녁에 출발할 때, 그 역무원에게 내 여권을 전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내일 새벽에 그 열차가 지나가는 시간에 맞추어 플랫폼에 나가 있으면, 아내에게 부탁받은 역무원이 잠시 나와 초록색 여권을 한번 흔들 것이라는 것이었다. 크로아티아로 향하는 그 기차의 슬로베니아 수도의 정차 시간은 아마 한 5-10분 정도. 내가 무사히 그 역무원을 발견하고, 기차에 타서 여권을 건네받으면, 크로아티아로 들어갈 수 있고, 못 만나면, 그 여권을 집 주소로 다시 보내줄 수 있도록 아내는 역무원에게 집 주소와 이메일 주소를 건네주겠다는 것이었다.
아내의 계획을 들은 난, 처음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다니는 학생들이 돈을 아끼며 잠을 자는 곳 같은 유스호스텔로 가 흰 수건 한 장을 받아들고, 공용 화장실 옆 2-3인이 함께 쓰는 침실 방으로 들어갔다. 새벽에 기차역에 늦지 않게 나가서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일찍 대충 씻고 누워 잠을 청하려는데, 한 외국 여학생이 “하이” 하면서 들어왔다. 그때 아 이곳은 남녀 혼숙이구나 깨달았다. 다행히 이른 아침 기차역에는 거의 사람들이 없었고, 기차에서 나와 여권을 무슨 비밀 수신호처럼 크게 흔드는 역무원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 그 인상 좋은 역무원에게 고맙다며 몇 번이고 절을 하면서 그 기차에 올라타, 여권을 받아 들고, 크로아티아 국경을 통과해 학회장에 무사히 갈 수 있었다. 물론 학회장에 온 모든 사람들은 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어제 한 명 못 온 사람이 너구나” 하면서.
내가 두 번째 포닥 생활을 시작한 스위스 바젤 (Basel)은 라인강 (Rhine river) 을 끼고 양쪽으로 예쁜 올드타운 (old town) 을 가지고 있는 소도시였다. 노바티스 (Novartis)와 로쉬 (Roche) 등 바이오 케미컬 회사들과, 매년 있는 아트바젤 (Art Basel; contemporary art worldwide)과 바젤월드 (Baselworld; the watch and jewellery show) 행사가 열리는 나름 국제도시인 셈이라, 지역 언어인 스위스 독일어를 쓰지 않아도 큰 생활에 어려움은 없었고, 인상적인 지역 봄 축제인 파스나흐트(Basler Fasnacht; the carnival of the city of Basel)를 준비하기 위해, 일 년 내내 지역 곳곳에서 피콜로 (piccolo) 연습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저녁 풍경을 가지고 있다. 실험실이 영국에서 옮겨와, 실험실 동료들이 일하면서 자주 영국 BBC 라디오를 들었고, 나 또한 영국식 영어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일상은 실험실, 집, 실험실, 집이었으며, 지상 최대의 목표는, 늘 에어컨이 틀어져있는 암실에서, 레이저 빔을 현미경으로 잘 쪼여줘 (Laser alignment), 실험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일상은 매일 새벽에 아기 기저귀 쓰레기를 챙겨서 자전거를 타고 출근해, 이 전 실험실에서 실험한 결과들을 논문으로 정리 출판 목표로, 새로운 실험실에 일이 시작되기 전에 논문을 쓰고, 다른 동료들이 출근할 즈음 같이 일상을 시작했다. 늘 암실에서 (레이저 가열 방지를 위한) 에어컨 소음을 들으며, 조금은 두꺼운 옷을 챙겨 놓고, 실험 시작되기 전에, 좋아하는 앤초비 (서양식 멸치 젓갈; anchovy)가 가득 들어있는 나폴리 피자 (Napoli pizza)를 동네 가게에서 한판 사와 학교 자판기에서 뽑은 코카콜라 제로 (zero)를 늘 함께 마시며, 주문처럼 오늘은 실험이 잘 되면 좋겠다 생각하곤 했었다.
연구자에게 매년 혹은 2년에 한번 정기적으로 갈 수 있는 학회가 있다면 큰 동기부여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한해 아니면 두해 동안 공부하고 연구 주제 설정 및 계획한 후, 실험한 내용을 가지고 포스터나 구두 발표를 통해서 다른 연구자들과 의견을 나누는 일은 중요하다. 나처럼 분야를 많이 옮겨 다닌 사람은 아직도 새로운 학회를 찾아다니니, 꼭 좋은 예가 되거나 나 스스로 학회 관련 좋은 경험을 가지고 있지는 못한 거 같다.
아마도 뇌과학 분야에서 가장 큰 학회로 알려진 미국의 Society for Neuroscience의 규모는 연회 회원 수 3만 7천 명 (2017), 매년 학회 참석자 2만 7천명 (2019)을 넘는다 [2]. 잘 알려진 이 학회 참석 요령 중 하나는, 유명한 명사들의 자기 실험실의 10년 이상의 연구 내역을 알리는 큰 강연 쫓아다니지 않기 (특히나 요즘은 명사들의 강연은 유튜브 (Youtube) 나 테드톡 (TED talk)으로 쉽게 보고 배울 수 있으니 더욱더), 내 실험과 실험실에 관련된 포스터 중심으로 새로운 정보 얻기, 다른 실험자들과 논문에서 볼 수 없는 실질적인 정보 얻기가 될 것이다. 다른 동료 과학자들과 이야기해보면, Society for neuroscience 와 같은 큰 학회보다는 Cosyne [3], Gordon research conference [4], FASEB [5] (저의 연구분야 학회에 국한된, 그리고 미국에 국한된 예들임을 양해 드립니다.)과 같은 전문적인 작은 학회들을 선호한다. 모든 것을 다 배우고 연구할 수 없고, 자신과 관련 있는 세분화된 연구자들이 모인 학회를 선호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잘나가는 실험실 사람들끼리 주로 모여서 밤새 술도 마시고, 토론하고 이야기하는 사이에서, 영어도 잘 못하고, 연구 경력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 아는 동료들도 많이 없는 학회장에서 쉽게 어려운 실험 과정들에 대한 토론을 마냥 즐기기에는, 돌이켜보면, 진입장벽이 높지 않았나 생각된다. 차라리 큰 학회에서 미리 꼼꼼히 보고 배우고 싶은 것들을 준비, 일정을 짜서 돌아보는 것이 마음이 더 편했던 거 같다. 기대보다 별로였던 포스터 관람에 실망도 하지만, 의외의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가끔은 찾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해외의 학회 참석 출장은 시차 적응이 큰 난관임이 틀림없다. 예전에 같이 연구했던 한 노 교수님의 유럽 학회 발표를 앞두고, 자신의 일어나는 시간을 유럽시간으로 한 보름쯤 전부터 천천히 변경해 나가시는 모습은 참 인상적이었다. 파워 포인트만 만들어 가는 것이 발표 준비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듯이.
국내 대학원 시절 해외 학회 참석 출장을 가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열정만 가득한 대학원 시절, 관심 있는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가 큰 학회에서 발표를 했고, 난 그 수상자의 논문을 비행기 안에서 읽고, 수백 명이 들어가는 큰 홀에서 발표를 마친 그 노벨상 수상자에게 가서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을, 줄을 서서 잘 하지도 못하는 영어로 물어봤던 기억이 난다. 참 많은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있던 그 노벨상 수상자는 내 질문에 약간은 지친 듯 (앞의 많은 사람들의 질문으로 인해) 성의 없이 빠르게 답한 후 사라졌다 (그도 신이 아닌 사람이지 않는가). 또 다른 기억은 끝까지 잘 이해되지 않는 포스터 앞에서 계속 설명해 달라고 발표자를 귀찮게 했던 일, 그래서인지 발표자는 나를 피해서 계속 다른 청중들과만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 (난 갑작스럽게 그곳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아마도 지금이라면, 좀 더 요령 있게 발표자와 소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학회 (포스터/구두발표) 및 다른 형식의 세미나를 포함해서, 발표는 아마도 발표 (파워포인트 준비, 구두 발표 연습 등) 자체가 40%, 나머지 더 중요한 60%는 질문에 대한 적절한 응답/토론에 있지 않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영어 (혹은 다른 언어)로 다양한 청중에게 발표하니 40% 역시 잘 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40%를 쉽게 내용을 잘 전달하지 못하면, 아예 질문을 받지 못하고, 60%는 사라진다. 60%를 잘 하기 위해서 늘 동료 연구자들과 적극적 토론, 그리고 자신이 생각할 때 궁금한 점들을 계속 파고들고, 공부해야 한다. 발표자 뿐만 아니라 질문자의 태도 역시 중요하다. 기본 구조가 경쟁이라고 볼 수도 있는 연구사회에서 싸움닭처럼 질문하지 않는 태도, 감정을 배제한 토론을 매 순간 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이는 대학원생으로서 경력까지 합하면 2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도, 여전히 부족한, 그래서 더 배우고 노력해야 하는 나 스스로에게 하는 진심 어린 충고다.
최근의 학회 포스터 발표 경향은 (아마도 심해진 경쟁 때문이겠지만), 막 실험을 시작하는 단계에서의 자유로운 토론의 포스터는 거의 없고, 이미 다 끝난 실험의 완전체를 가져오거나, 논문이 투고 상태에 있거나, 이미 출판된 다음 포스터를 가지고 오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포스터 발표 후 때에 따라 논문 출판까지의 시간이 2-3년 혹은 그보다 더 길게도 걸리니, 그 사이에 아이디어를 보고 간 다른 실험실에서 빨리 실험해 먼저 논문 출판하는 일 또한 종종 일어난다. 이해는 가고, 조심해서 발표하는 것이 맞지만, 좀 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토론이 줄어든다는 점은 안타까운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도, 학문의 분야는 정말 넓고, 이해하지 못하는 분야 또한 정말 많으니, 큰 학회장에서 각자의 연구주제를 가지고 발표하고 토론을 통해 서로에게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연구자에게 큰 기쁨이다. 학회장에서 새로운 비슷한 연구를 하는 지구 반대편의 대학원 생을 만나는 일, 연락처를 주고받는 일, 오래된 옛 동료를 우연히 학회장에서 만나는 일은 행복한 일이다. 꼭 학회장에서 새로운 지식과 테크닉을 습득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휩쓸려 돌아다니다 실험실로 돌아오더라도, 열심히 실험한 나에 대한 1-2년에 한 번 찾아오는 작은 보상으로 생각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도 이미 의미 있고,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아직도 아내와 종종 이야기한다. 아내는 내 문자를 받고, 취리히 출발 야간 열차 출발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3살 꼬맹이를 업고 얼마나 뛰었는지 아이의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렸다고. 열차 역무원에게 포스트잇에 내 이름과 집 주소, 이메일 주소를 또박 또박 써 주면서, 혹시 못 만났을 경우 집 주소로 보내주시길 간곡히 부탁하던 아내의 모습에 대한 상상과 그 포스트잇은 여전히 내 마음과 여권에 아직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관련 자료 링크]
[1] 솅겐 협정 (Schengen agreement): https://ko.wikipedia.org/wiki/%EC%86%85%EA%B2%90_%ED%98%91%EC%A0%95
[2] Society for Neuroscience: https://en.wikipedia.org/wiki/Society_for_Neuroscience
[3] Cosyne, Computational and Systems Neuroscience: http://www.cosyne.org/c/index.php?title=Cosyne_21
[4] The Gordon Research Conferences: https://www.grc.org/about/
[5] FASEB, Federation of American Societies for Experimental Biology: https://www.faseb.org/Science-Research-Conferences/gclid/CjwKCAjww-CGBhALEiwAQzWxOqTCyiBJSWwd5L-3TKhxRgB_TyhZ0HX1picCPx-pqDGPYqWbyXhsshoC_F8QAvD_B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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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물리학과에서 학부, 석박사 학위 후, 지금은 국외 뇌 연구소에서 실험하면서 뇌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주로 뇌과학 관련 책 소개 및 감상을 공유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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