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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노트] 내일이 오면
Bio통신원(곽민준)
“내일이 오면 사라져 버릴 것들에게 더 이상은 정을 주지 말자.
내일이 오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다 사라질 거야. 너무 걱정 말자.”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돌아온 지난겨울의 어느 늦은 금요일 밤, 대충 씻고 침대에 누워 여느 때처럼 유튜브를 켠 후 우연히 듣게 된 이 노래가 왜 그렇게 내 이야기처럼 공감되고 마음에 와닿았는지 모르겠다. 대학원 입학 이후 계속 반복되던 좌절 때문이었을까? 내일이 오면 다 사라질 거니 걱정하지 말라고, 더 밝은 날이 올 거라고 말하는 십년지기 두 래퍼의 합동 무대가 굉장히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오랜만의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지난 주말, 화장실에서 씻으며 이 노래를 듣다가 문득 작년에 연구실 뒷자리 형이 했던 한마디 말이 생각났다.
‘이 노래 들으면은 그거 생각나. 니가 예전에 브릭에 쓴 그 냉장고 글. 내가 랩 들어오기 전의 일이라 실제로 본 건 아니지만, 냉장고 문 하나 못 닫아 가지고 둘이서 땀 뻘뻘 흘리고 막 밤에 뛰어가고 그랬을 그 장면이 그려져 가지고, 그게 그냥 생각이 난다.’
형의 말을 떠올리니 별 희한한 일로 고군분투했던 실험실 일화들을 다룬 예전 글들이 생각나, 씻고 나오자마자 지난 1년간 랩 노트 연재를 진행하며 쌓은 몇 편 안 되는 글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내 이야기여서 그런지 웃기긴 했지만, 다 보고 나니 약간 씁쓸하기도 했다. 어쩜 이렇게 전부 부정적인 내용밖에 없는 걸까? 한 달 실험이 날아가고, 자다 일어나 랩에 뛰어가고, 1년째 반복되는 실패에 좌절하고, 매일 늦은 새벽 귀가하고, 그런데 최저 시급도 안 되는 돈을 받고 있고. 뭔가 되게 답답하고 화나는 상황인데, 그렇다고 누굴 탓할 수도 없는, 그럼 이게 내 잘못인가, 내 노력이나 능력이 부족해서 벌어진 일인가 고민해 보지만, 솔직히 내가 그렇게까지 부족하지는 않은 것 같고, 도대체 원인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결과는 안타까운 그런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막 나쁘지는 않았다. 이전에는 이런 생각을 하면 답답하고 속상한 마음이 들었는데, 이번에는 덤덤했다. 계속되는 실패에 익숙해져서일까? 이제는 상황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너무 당연해서 무뎌진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혹시 지난주에 무려 일주일이나 실험실에서 벗어나 휴가를 즐기고 왔기 때문일까? 어쩌면 마지막 가설이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휴식은 보약이니 말이다.
2주 전쯤 지도교수님을 찾아가 요즘 잘 되는 실험이 없다고 솔직히 말씀드렸다. 뭔가 이것저것 해보고는 있는데, 왠지 알 수 없게 실험이 잘 풀리지 않아서 ‘일단 되는 것부터 해봐야지’하는 생각에 이전부터 편하게 반복해오던 간단한 실험들을 우선 진행해보았지만, 심지어 쉬운 실험들조차 안 풀려 막막한 상황임을 전달드렸다.
“네,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뭔가 막혀서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아, 네…….”
“음, 한 가지 생각이 있긴 한데……. 이건 어떠신가요? 어차피 잘되지 않는 걸 잡고 있어봤자 결과는 나오지 않고 스트레스만 쌓입니다. 그럴 바에는 아예 잠시 새로운 곳에 가 환기를 하고 오는 게 어떨까요?”
‘음….’
정말 감사한 제안이었지만, 망설여지기도 했다. 2가지 이유 때문이었는데, 첫 번째는 혹시 휴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도 지금까지 잘 안되었던 실험들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미련이 남아서였고, 두 번째는 실험실을 벗어난다고 해도 여전히 연구실 생각을 완전히 떨칠 수 있으리란 확신이 없어서였다. 특히 두 번째 이유로, 만약 휴가를 간다고 해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교수님은 내 마음을 읽으셨는지 본인의 이야기를 간단히 해주셨다.
“어렸을 적엔 매일 머물던 집을 며칠 떠났다가 돌아왔을 때의 느낌, 정말 익숙한 장소인데 뭔가 낯설고 새로운 그런 느낌이 정말 좋았습니다. 비슷한 기분을 한 번 느껴보시죠. 온종일 머물던 랩을 벗어나 완전히 모든 걸 잊고 잠시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을 때 그런 새로운 기분이 드는지. 새로운 기분에서는 실험이 훨씬 잘 될 수도 있잖아요?”
새로움! 사실 올해 들어 새로움이란 기분을 느낀 적이 별로 없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겠지만, 대학원 생활이란 게 원래 하루하루가 반복되는 일상이다 보니 색다른 경험이나 낯선 기분을 느낄 일이 별로 없다. 불과 몇 년 전 학부생이던 때만 해도 이번 주말에 여자친구와 어디로 데이트를 갈지, 이번 방학 때는 또 어떤 새로운 장소로 여행을 가볼지, 새로운 경험을 할 생각에 항상 들떠있었는데 말이다.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몇 년 전처럼 여행을 떠나 새로움을 느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 일주일 만이라도 반복되는 실험 따위 모두 잊고 낯선 곳에서 새로움을 느낀 후, 그 기분 그대로 랩에 돌아오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요즘 시국에 도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것도 이렇게 갑자기! 고민 끝에, 일단 서울로 향했다. 물론 서울이란 도시가 낯선 곳은 아니고 이미 익숙한 장소가 많긴 하지만, 그래도 대한민국 최대 도시인데, 설마 일주일 정도 나에게 새로움을 선물해 줄 장소들이 없겠는가?
그렇게 이틀 후 곧바로 서울로 떠났고, 일주일간 머물다 돌아왔다. 마치 해외여행을 갔을 때처럼 아침부터 밤까지 빽빽하게 계획을 세워 구석구석 여행했고, 기분을 내기 위해 기념품도 엄청나게 샀다. 그렇게 온종일 바쁘게 움직여 모든 계획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엔 숙소로 돌아와 즉흥적으로 그다음 날 계획을 세우느라 정신없이 밤을 보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는데, 피곤한 상태에서도 내일이 오면 어디에 가서 뭘 할까 하는 기대에 얼른 눈이 감기지 않았다. 며칠 동안 설렘이 매일 반복되는 오랜만의 행복한 경험이었다.
그렇게 금방 일주일이 흘러갔고, 여행의 기분 좋음을 간직한 채 다시 랩에 돌아왔다. 확실히 마음이 편해진 상태로 말이다. 매일 하던 쥐 수술도 2주 쉬고 다시 하니까 새롭게 느껴졌다. 뭔가 재미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진행했던 세포 실험도 오랜만에 하니 반가웠다. 왠지는 모르겠는데, 조금은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특히 안 좋은 결과를 마주해도 기분이 딱히 나쁘지 않았다. 원래 실험은 잘 안되는 거니까 괜찮다고, 그저 내 할 일에 다시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스트레스도 줄었다.
물론 휴가 한 번으로 내 연구에 엄청난 변화가 있을 거라 기대하는 건 절대 아니다. 그냥 쉬고 왔을 뿐이고 내 기분이 조금 더 좋아졌을 뿐이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대학원에 입학할 때는 과학자의 멋진 모습, 완성된 논문이나 연구 결과를 상상하며 행복한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실험 하나도 제대로 해결하기 어려운 현실에 그런 기대와 상상은 저 멀리 떠나버렸고, 반복되는 일상에 조금은 지쳐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 기회 덕분에 매일 반복되던 오늘이 조금은 기대되는 새로운 내일로 바뀌었다. 대단한 연구를 완성하는 것뿐만 아니라, 작은 실험 하나 무사히 마치는 것도 충분히 즐거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아직 오지 않은 먼 미래를 기대하며 힘든 하루를 버티는 게 아니라,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일을 해결하며 하루하루 조그만 성과에 행복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기분이 얼마나 갈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내일이 기대된다.
문득, 내일이 오면 괜찮아질 거니 걱정하지 말라는 노래 속 구절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른다. 과연 그럴까? 내일이 오면 우리의 문제가 정말 없어질까? 글쎄, 그렇지는 않을 거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무언가 달라지겠는가. 그럼 그보다 먼 미래, 만약 10년 뒤에도 우리가 과학을 하고 있다면, 그때는 문제가 없어질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니 알 수 없다. 그저 나와 내 동료들, 친구들, 나아가 각자 실험실에서 고군분투하는 모든 과학자가 잘 되길 빌며,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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