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이 오는가 보다. 캠퍼스 한구석에 자리 잡은 나무에 봄의 시작을 알리는 매화가 폈다. 날씨가 추워지며 겨울이 온 게 바로 어제 일 같은데, 벌써 날씨가 다시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 더 지나면 산수유, 개나리, 곧이어 벚꽃이 피기 시작할 테고, 눈 깜짝할 새에 또 한 번의 봄을 지나 뜨거운 여름을 맞이하게 될 거다. 덥고 습한 날씨에 짜증 나는 여름이겠지만, 이 역시 금방 지나갈 거고, 가을, 겨울을 보내고 나면 곧 다시 내년의 봄꽃을 마주하게 될 거다.
대학원생의 시간은 이상하게 빨리 흐른다. 분명히 내 계획은 완벽했는데, 온종일 무언가 열심히 하다 보면 계획을 다 마치지 못한 채 하루가 끝난다. 그러나 대학원생도 사람인지라 잠은 자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집에 들어가 뇌를 쉬게 하고 다시 연구실에 나와 또 계획을 실천하지 못하는 하루를 보내길 반복하다 보면 순식간에 나의 시간이 삭제된다. 계절이 없어지고 1년이 없어진다.
그렇게 벌써 연구실에서의 2년이 흘렀다. 코로나 대유행 사태 이전 학부생이던 시절, 학교 근처 벚꽃 명소를 찾아 연구실 동료들과 또 여자 친구와 마스크 없이 즐겁게 꽃구경을 했던 게 불과 얼마 전 일 같은데, 그게 벌써 3년 전이다. 안타깝게도 그사이 내 연구는 제대로 진전된 게 없지만, 주변은 많이 변했다. 지난 2월 연구실에 첫 석사 졸업생이 나왔고, 이어서 무려 1년 반 만에 새로운 사람이 입학했다. 온종일 같이 생활하는 랩 멤버가 바뀌는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이고, 심지어 2명이 동시에 들어오고 나가는 큰 사건이었는데, 참 이상하게도 떠나간 사람이 서운해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연구실 분위기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워낙 바쁘게 지나가는 대학원 생활에 정신없이 하루하루가 흘러가다 보니 자연스레 변화에 적응한 것 같다.
떠나간 사람의 존재감이 옅었던 건 아니다. 본인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우리 랩의 첫 졸업생은 상당히 특이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의도치 않게 주변에 사건·사고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기도 했다. 게다가 대학원 생활 도중에 이런저런 쉽지 않은 경험을 많이도 했다.
이 사람의 대학원 생활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내가 학부 마지막 1년을, 졸업 후 입학할 대학원에서 연구참여하며 보낼 것으로 결정하고 그 시작을 2주 정도 앞둔 어느 날, 재미없게 학부를 4년 만에 칼졸업하고 내가 들어갈 연구실에 1년 일찍 입학한 학부 동기를 만날 일이 있었다. 내가 가게 될 연구실이 궁금해 대학원생들이 얼마나 있는지 사람들은 어떤지 물었다. 재미없는 학부 동기 겸 대학원 선배는 누나 2명과 자신까지 총 3명의 대학원생이 있는 작고 오붓한 신생랩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조금 더 자세히, 자기보다 1년 더 일찍 입학한 선배 1명과 이번에 같이 입학하는 동기 1명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나의 새로운 식구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 얘기를 처음 듣고 설렘 반 긴장 반의 상태로 일주일을 보낸 후, 다시 재미없는 동기 겸 선배를 만나 또 한 번 같이 밥을 먹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아주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갑자기 자기 연구실에 대학원생이 2명뿐이라는 것 아닌가?
‘누나 2명에, 형까지, 총 3명이라며?’
‘지난주까진 그랬는데, 이제 2명이야.’
아니, 그새 1명이 하늘로 솟기라도 했다는 건가, 아니면 대학원을 관두기라도 했다는 건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그 이유를 듣게 되고 더 당황하게 되었다.
‘이번에 입학하기로 했던 동기 한 명이 학부 강의 하나를 수강하지 않아 대학 졸업 요건을 못 갖췄대. 그래서 한 학기 후에 다시 입학하기로 했어.’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니던 대학에서 무언가 문제가 있었던 듯했다. 나중에 알게 내용인데, 정확히는 학과 사무실 행정 선생님과 소통에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직전 학기에 졸업에 지장 없다고 분명히 확인받았는데, 알고 보니 수강한 과목 중 하나가 부전공 학점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었고, 교수님께 사정을 말씀드렸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결국은 졸업이 연기되었다고 한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 안타까운 일의 주인공은 계획이 꼬인 걸 알게 된 날, 다음 주면 입학하게 될 줄 알았던 연구실 실험대에 앉아 훌쩍이며 눈물의 PCR을 돌렸다고 한다.
그 당시 본인에겐 아주 심각한 일이었겠지만, 입학이 한 학기 느려졌을 뿐 그래도 큰 문제없이 이 사건은 잘(?) 지나가게 된다. 그해 여름 오늘의 주인공은 무사히 연구실에 다시 입학하고, 한 학기 후 나도 따라 입학하여 대학원생 동료가 되었다.
금방 시간이 흘러 내 대학원 첫 학기가 지나갔다. 그리고 맞이한 유난히 더웠던 7월 중순 어느 날, 대학원 생활 첫 1년을 지나 보낸 오늘의 주인공은 자신의 생일을 기념하러 본가로 며칠 떠나 있는 상황이었다. 평소 활발하던 사람이 한 명 사라지고 조용해진 연구실 구석의 내 자리에 앉아 실험 데이터를 정리하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 집중력이 흐트러지려던 찰나, 어디선가 전화가 왔다. 발신자는 생일 파티를 무사히 끝낸 오늘의 주인공이었다.
‘너 혹시 아직도 자취할 방 구하고 있니?’
‘네. 왜요?’
‘괜찮은 방이 하나 있어서.’
‘오! 어딘데요?’
‘우리 집.’
‘엥? 누나 집? 누나 집 있는 건물이요?’
‘아니, 그냥 내 방.’
‘응? 누나는?’
‘나……. 휴학하려고…….’
그렇게 한 명의 동료가 갑자기 사라졌다. 다른 사람의 일이라 자세히 말할 수 없는, 그리고 나도 전부 다는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사정과 진로와 장래에 대한 심각한 고민 끝에 이 사람은 우선 한 학기를 쉬며 앞으로 인생을 계획해보기로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2주쯤 지나고 비가 조금씩 떨어지던 어느 날, 연구실 근처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핫바로 간단한 저녁을 먹은 후 몸 건강히 잘 지내라는 인사를 주고받으며 아주 건조하게 이별했고, 나는 이게 이 사람과의 마지막일 줄 알았다. 보통 대학원 휴학은 자퇴 직전 단계인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떠나간 이를 잊지 못한 연구실의 다른 누나가 ‘언니 다시 돌아올 거야!’라고 외칠 때도 나는 마치 나와 디스커션 할때의 교수님처럼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 생각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내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작년 2월, 떠나갔던 그 사람은 너무나 태연하게 다시 돌아왔다. 진짜 말 그대로 한 학기를 푹 쉬고 다시 연구실에 돌아왔다. 안 올 거라 장담했는데 막상 돌아오니 뻘쭘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5명에서 오순도순 잘 지내다 갑자기 휴학하고 떠나버린 것에 대해 섭섭한 마음도 있어서 약간은 떨떠름하게 그 사람을 맞이했다.
다시 돌아온 사람은 금방 랩에 다시 적응했고, 본인이 사라진 사이 연구실에 들어온 두 신입생과도 금방 친해졌다. 고민 끝에 이 사람은 대학원을 1년 더 다닌 후 석사 졸업을 하기로 했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받아 다시 대학원 생활을 시작했다. 이 새로운 프로젝트가 내 연구와 꽤 연관되어있었던 덕분에 졸업 발표와 논문을 준비하던 시기에 관련 이야기를 많이 나누며 도움도 줬고, 그래서 그런지 마치 내 발표처럼 마음 졸이며 지켜본 우리 연구실의 첫 디펜스는 다행히도 무사히 끝났다. 발표가 끝난 직후, 박사님이 준비해주신 우리의 메시지가 한 줄씩 적힌 와인병을 깜짝 선물 받은 첫 졸업생은 눈물을 살짝 훔쳤고, 박사님께서 ‘어, 이런 분위기 아닌데 원래…….’라고 당황해하시는 모습을 보고 다 같이 웃으며, 잠시 돌아왔던 사람을 이번엔 졸업으로 완전히 떠나보냈다.
그렇게 가버린 우리 연구실의 첫 졸업생은 지금 좋은 회사에 취직하여 열심히 적응하는 중이다. 몇 년 동안 포항 촌구석에서 보냈던 봄을 지금은 무려 서울 도심에서 맞이하게 되었으니 아주 신이 났을 게 분명하다. 곧 서울에서 꽃놀이도 할 거고, 봄을 보내고 여름을 맞이하게 될 거다. 덥고 습한 날씨에 짜증 나는 여름이겠지만, 이 역시 금방 지나갈 거고, 가을, 겨울을 보내고 나면 곧 다시 내년의 봄꽃을 마주하게 될 거다. 이처럼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동안 졸업생은 졸업생 나름의 삶을 살아갈 테고, 연구실에 있는 우리는 우리대로 열심히 연구 활동을 이어갈 테다. 곧 우리 연구실의 두 번째 세 번째 졸업생이 나올 거고, 내 차례도 금방 다가올 것이다. 대학원 입학 이후 2년이 눈 깜짝할 새 사라진 걸 생각해보면 다음 2년도 순식간일 거고, 그다음 2년도 또 금방 사라지게 될 거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나는, 우리의 첫 졸업생은, 아직 연구실에 남은 대학원생 동료들의 삶은 어떻게 되어있을까?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일단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는 중이다. 우리의 미래를 상상하고 그려나갈 여유도 없고, 기다려주지 않는 시간을 탓할 여유도 없는 바쁜 대학원 생활이지만, 일단 다들 최선을 다하며 각자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바쁘게 걸어가는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랩에도 봄은 오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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