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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부터 10까지] 소고기
Bio통신원(워킹맘닥터리)
2-1.
하루의 24시간이 온전히 내 것이 된다면 행복하지 않을까?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티브이도 마음껏 보고, 뒹굴거려도 누구 하나 나를 터치하지 않는다면?
딱 1주일이었다. 몸이 편하면 마음이 불편했다.
조금 쉬어가자고 다짐했으나, 내 몸은 늘 그래 왔듯 컴퓨터 앞에 앉아 하이X레인넷을 켜고 채용 공고를 기웃거렸다.
차분하게 앉아 공고문들을 읽어나갔다.
나와 전공적합성이 맞는지, 내가 제출할 서류는 기본 조건에 맞는지, 서류 도착은 언제까지 되어야 하는지, 준비할 목록들을 다이어리에 적었다.
연구실적을 모아둔 파일을 열고 최신순부터 과거 순으로 날짜를 확인해가며 5년 이내 실적들만 새 폴더에 추려낸 후 PDF 파일 하나로 다시 압축하고, 논문 제목, 저널, 날짜, 권호수, 페이지 등을 정리해나갔다. 학회 참가, 초록 발표, 포스터 발표, 학회 수상이력 등의 증빙서류 목록을 정리해나가면서, 혹시라도 빠진 것은 없는지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인쇄할 파일을 담은 USB를 들고 근처 인쇄소로 달려가 컬러 인쇄 후 링 제본 작업을 했다. 작은 상자에 연구실적 한 권, 서명 원본이 담긴 박사학위논문집과 그 외의 서류를 넣고 잘 포장했다. 서류 도착 마감일까지 시간은 넉넉했으나 배송 완료 날짜를 다시 한번 묻고 등기를 보냈다.
2-2.
서류 제출 후 결과를 기다리며 종종거리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불 빨래를 하고 베개 커버를 바꾸고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했다. 자전거를 타고 시장으로 달려가 할머님들이 파시는 나물들을 구경하고, 반찬거리를 사들고 와서 저녁 식사를 만들었다. 장롱을 다 뒤집어엎어 입지 않을 옷들을 비워내고 남은 옷들을 재 정렬하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루는 유X브로 노래를 켜 놓고 손걸레질을 하고 있었는데, 노랫소리가 살짝 작아지더니 메시지 하나가 온 듯 휴대폰이 울렸다.
'1차 서류 통과하셨습니다. 2차로 공개 강의 및 면접이 있으니...'
심장이 쿵쾅쿵쾅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눈앞에 심사위원들이 있는 것처럼 손에 땀이 맺혔다.
눈썹 문신 받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2-3.
면접 하루 전날 남편과 함께 학교 근처 숙소에 도착했다. 노트북에 자료를 띄어놓고 공개강의를 연습했다. 지금까지 해왔던 랩미팅이 몇 번인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음에도, 목소리가 떨리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예약해둔 미용실에 달려가 머리 드라이를 받았다. 근처 식당에서 잔치국수와 만두, 삶은 계란을 먹고 면접 시간보다 1시간 빨리 학교에 도착했다.
공개강의가 있을 회의실(이었던 것 같다)에 들어갔다.
심사위원이 세로로 길게 앉아있고, 미리 보내 놓았던 내 강의자료가 화면에 띄워져 있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세차게 뛰었다.
문 앞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갑자기 왜 이럴까?
차라리 피피티를 화면에 띄우는 것을 내가 직접 했다면, 그 시간 동안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수 없이 연습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덜덜 떨며 공개강의를 했던 것 같다.
'아 이번도 망했구나.'
공개강의가 내 마음대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바로 있을 1:다수 개인 면접에서는 오히려 떨지 않고 대답하고 나왔다.
그 와중에, 면접자들에게 차비를 준다는 말을 듣고는 위안이 되었다.
2-4.
학교 본관에는 계단이 엄청 많다.
헛디디면 구를 것 같이 무서운데, 한눈에 들어오는 초록 배경은 너무 아름답다.
면접을 끝내고 계단을 하나씩 밟으며 내려오는데, 본관 주차장에 차를 대기시키고 한참이나 기다려준 남편을 보자마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어린애처럼 울 수 없으니 최대한 웃으며 남편을 바라보는데, 숨길 수 없는 아내의 표정을 읽은 남편은, '국내 여행 온 게 얼마만이야~ 재밌네~'며 위로해줬다.
그 이후의 삶도 변한 것은 없었다.
단지 다시 하루의 24시간이 온전하게 내 것이 되었을 뿐이었다.
유X브로 노래를 켜 놓은 채로 화장실 선반 위에 두고는 욕조에 물을 받아 신나게 이불을 밟으며 빨래를 하고 있는데, 또 한 번 휴대폰의 노랫소리가 작아지더니 휴대폰이 울렸다.
'축하합니다. 최종 합격하셨습니다.'
축하 메시지 밑에 적힌 담당 교무팀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합격자가 제가 맞나요? 혹시 동명이인이 있었나요?"
"^^ 합격자가 맞으십니다. 축하드립니다."
꿈에 그리던 합격이 나에게 오면, 뛸 듯이 기쁘고 행복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덤덤해서 이상했다.
이건 꿈인가?
곧바로 남편, 부모님, 어머님댁, 그리고 지도교수님 순으로 전화를 걸어 소식을 전해드렸다.
"엄마. 뭐해? 아~ 별 일은 없고. 그리고, 나 교수됐어^^"
우리 엄마는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를 듣고 뛰쳐나온 동생이 연달아 지르는 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남편은 내 전화를 받자마자 그 길로 퇴근했다.
남편은 비싼 소고기를 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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