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구실이 불탔다니, 아직 믿기지 않는다. 대학원 생활 동안 정말 별일을 다 겪었고, 이제는 상상할 수 있는 웬만한 실패와 좌절은 다 경험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앞으로 또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충분히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내 오만이었다. 나는 아직 최악의 상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막상 일이 닥치자 정말 당황스러웠고 눈앞이 캄캄했다. 물론 내 멘털 탓을 할 가벼운 상황은 아니긴 하다. 이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니 사실 그 누구라도 좌절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세상에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이건 정말 선을 세게 넘어 버린 거다. 참, 어쩌다 나한테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사건이 벌어지던 바로 그때, 우리는 여느 때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근처 칼국숫집에서 점심 식사 중이었다. 이제 음식이 도착하고 막 젓가락을 들기 시작한 순간, 내 앞에 있던 형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어? 뭐라고?!
…….어??!!! 아 진짜? 랩에 불이 나? 심하나? 어디서 난 건지 못 찾고?
아……. 그래, 뭐, 한번 찾아봐라. 일단 그럼 우리도 돌아가 볼게"
랩에 불이 났다고 한다. 혼자 점심을 따로 먹고 실험하는데, 이상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고, 곧 연기 때문에 눈앞이 뿌예지기 시작했단다. 소식을 듣고 혹시라도 큰일일까, 아쉽지만 젓가락을 내리고, 새것이나 다름없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칼국수를 남겨둔 채 곧바로 랩으로 향했다. 혼자 연구실에 남은 사람이 위험하지는 않을까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는데, 아까는 들리지 않던 경보음 소리가 이제 들리기 시작했다. 상황이 더 심각해진 듯했다.
"아니 지금 여기 사람들 전부 불 어디서 났나 찾고 있는데 안 보여. 조금만 더 찾아보고, 근데 이제 나가야 할 것 같아. 연기가 엄청 많이 난다."
작은 불은 아닌 듯했다.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많이 흥분되어 있다. 큰일이 아니어야 할 텐데, 하고 걱정하던 바로 그 순간, 우리 차 옆으로 소방차 두 대가 지나갔다. 건물 근처에 가보니 이미 더 많은 소방차가 도착해있다. 연기도 엄청 난다. 불도 보인다. 건물에서 조금 떨어져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람들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건물을 바라보고 있다. 이제는 칼국수가 아깝다는 생각이 안 든다.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바로 저 건물 안에 우리의 많은 것들이 들어있다.
‘뿌직, 파악!’
건물 외벽 일부가 바닥에 떨어졌다. 위치가 익숙하다. 아마 3층 저 정도면 우리 연구실, 아니면 교수님 오피스? 불안하다. 하필 불이 보이는 위치가 참 공교롭다. 나 대신 다른 사람이 피해 보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필 내 자리 근처에서 불이 치솟는 걸 보니 너무 당황스럽다. 소방관 선생님들이 고군분투하시는 모습이 보인다. 이 더운 날씨에 저 두꺼운 옷을 입고 저 무거운 장비를 들고 저 뜨거운 불길 안에서 얼마나 덥고 힘들겠는가?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앉아 쉬시는 소방관들을 보고 있자니 참 고맙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분들의 수고스러운 노력과 우리들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불은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계속 보고 있으면 뭐하나, 스트레스밖에 더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일단 연구실 사람들 모두 현장을 벗어나기로 했다.
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 다 같이 영화나 보러 가기로 했다. 그렇게 영화관에 도착해 상영 시간을 살펴보고 있는데, 갑자기 다시 돌아가야 할 것 같다고 한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 불이 나던 그때 연구실 안에 있던 동료가 갑자기 두통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목 뒤쪽도 조금 당기는 것 같고 머리가 띵하니 어지럽다고 했다. 그 건물에 워낙 안 좋은 유독성 물질이 많다 보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곧바로 근처 병원의 응급실로 향했고, 대기 장소에서 이미 도착해있던 아래층 연구실 대학원생 두 명을 만났다. 몸이 안 좋던 동료는 검사를 받았는데, 다행히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하여 금방 퇴원했다. 이번 사건으로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가장 잘된 일이다. 아픈 동료가 검사를 받는 사이, 나머지 사람들은 이런저런 소소한 일들로 함께 시간을 때우다가 같이 저녁을 먹었고, 왠지 모르겠지만 찝찝한 기분에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 근처 산책로를 여기저기 배회하다 늦은 밤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집에 돌아와 씻고 침대에 누웠더니 연구실 동료가 보내준 SBS 8시 뉴스 하이라이트 영상이 도착해있었다. 놀랍게도 우리 연구실이 뉴스에 진출한 것이다. 썸네일에 보이는 뻥 뚫려버린 창문 너머로 책상 뼈대만 남고 다 사라져 버린 내 자리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참 묘했다. 아직 건물에 들어가 보지 못했는데, 웃기게도 뉴스 속 영상의 한 장면 덕분에 내가 돌아갈 곳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실낱 같이 품고 있던 희망을 쿨하게 놓아버리기로 했다. 문득, 고등학생 때 지금 다니는 대학에서 연 ‘이공계 학과 대탐험’이라는 캠프에서 과학자로의 내 꿈이 뉴스에 한 번 나와보는 거라고 어딘가에 적었나 발표했나 했었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날 나는 이 대학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고, 그렇게 원하는 대로 입학 후, 학부, 대학원 총 7년 반을 지나 드디어 뉴스에 내가 속한 연구실이 등장했는데, 상상했던 모습과는 매우 달랐다. 창문도 없고, 불도 꺼져있고, 책상과 냉장고는 다 부서져 버린 참담한 모습. 슬프거나 화가 나진 않았고, 그냥 어이없는 상황에 황당해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렇게 어쩌면 인생 가장 충격적이었던 하루가 지났다. 이날이 아마 6월 8일이었나? 그러니 두 달 조금 넘게 지났다. 이제야 마음을 내려놓고 그날 있었던 이야기와 솔직한 심정을 글로 담담히 써 내려갈 수 있게 되었다.
이번 사건으로 주변 분들이 참 많은 걱정을 해주었다. 하지만 불이 난 그날, 사실 나는 크게 절망하지 않았다. 다른 피해자분들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정작 가장 큰 피해를 보아 개인 손해만 300만 원에 달하고 연구 자료와 데이터도 전부 날아가 버렸지만, 나는 충분히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때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 현실이 녹록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가진 것을 잃은 건 괜찮았지만, 다시 그걸 되찾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되니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화재 복구는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불이 난 생명과학관은 출입금지가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사람이 생활할 수 없는 상태다. 연구실 장비는 전부 타버려서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보험금을 받는 것도 간단하지 않은 일이고, 많은 이들이 피해를 본 어려운 상황에서 학교와 어른들의 입장은 더 복잡한 듯했다.
이런저런 고민들과 여러 사람과의 대화 끝에 결국, 나는 그냥 도망치기로 했다. 지도교수님, 아니 이제는 전 지도교수님께서는 도망치는 게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맞게 올바른 대처를 하는 것이라고 해주셨지만, 솔직히 내 생각에는 그냥 도망이다. 연구실 복구에 애쓰는 몇몇 동료들을 두고 새로운 연구실로 거취를 옮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 데로나 도망치진 않았다. 도망을 치기 위해 고개를 돌려보니 지금까지 내가 보지 못했던 곳에 너무나 괜찮은 세상이 숨어있었다. 연구실을 옮기는 게 내가 먼저 떠올린 생각은 아니었기에 기분이 좋지 않기도 했고, 전문연구 요원 등의 문제로 방해물도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지금은 매우 만족한다. 너무 좋은 분들이 흔쾌히 도움을 주셨고, 덕분에 어쩌면 불이 나기 전보다 더 좋은 상황이라는 생각도 든다. 최악의 일이 벌어졌지만, 최선의 길을 찾은 것 같아 기쁜 마음이다.
10년, 20년 후 미래에 2022년 6월 8일 SBS 뉴스에 등장했던 화재사건을 내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새로운 지도교수님께서는 ‘지금은 슬프겠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덕분에 나랑 만나서 새로운 걸 많이 배울 수 있으니까 더 잘 될 거야. 같이 잘해보면 되죠’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사실 너무 맞는 말이다. 위기는 얼마든지 기회가 될 수 있고, 이번 화재가 내 인생에서 최악의 위기로 남을지, 최고의 기회로 남을지는 어디까지나 내 능력과 노력에 달려 있다. 그러니 한번 잘해보려 한다. 오늘 이 글이 랩 노트 연재 마지막 글이다. 당분간은, 불타버린 진짜 랩 노트를 새로운 연구로 채워나가는 데 집중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 화재를 반드시 좋은 기회로 만들어 보려 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아직은 쓰라린 이 아픔을 잘 극복하고 좋은 경험이었다고 웃으며 말할 수 있을 때, 다시 한번 나의 랩 노트를 기분 좋게 모두에게 공유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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