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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포닥 엄마의 생존기] 어쩌다 캐나다에서 살게 된 이야기
Bio통신원(오박사)
[딸 아이와 나]
나는 한국에서 해양생물 분자 유전을 전공하여 포닥 1년을 마치고, 결혼하며 캐나다로 넘어가게 되었다. 사실 이땐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어 잠깐 쉬고 싶기도 했었다. 정말 바쁘게 열심히 살았다. 그랬기에 정말 아무 대책 없이 무작정 캐나다로 떠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다시 할 수 없는 무모한 짓이었지만, 몰라서 용감할 수 있었다. 캐나다에 아무런 연고가 없었던 건 아니다. 남편 이모와 남편 형 가족이 살고 있어서 남편 학교도 다닐 겸 나는 쉴 겸 캐나다로 넘어오게 되었다. 현재 캐나다살이 이제 곧 5년 차에 접어들지만, 갈 때만 하더라도 2년 있을지 얼마 있을지도 모르는 상태로 가게 되었다. 처음 캐나다는 그냥 좋았다. 늘 바쁜 생활로 감기를 늘 앓고 살던 나는 감기라는 것이 일 년에 한 번 걸릴까 말까 하는 건강 상태가 되었으며, 인생에 있어서 쉼이라는 걸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현실이 보였다. 남편과 내가 가지고 온 돈이 바닥나기 시작했으며, 남편은 대학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곤 나 스스로 무슨 자존심이 상했는지 이대로는 한국으로 못 돌아가겠다 싶었다. 캐나다에서 경력을 쌓고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다. 그러다 남편이 대학이 아닌 part time으로 취직이 되었으며, 우리는 관광비자에서 취업비자로 체류할 비자와 명분이 생겼다.
그해 10월 기적이 또 한 번 일어났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생명이 주어진 것이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추수감사절 토요일 임신 테스트 두 줄, 너무 감사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아이를 딱히 기다렸던 것도 아닌데,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고, 너무 감사하고 울컥했다. 그것도 잠시, 엄청난 입덧과 임신성 저혈압으로 나름으로 고생하여, ‘내 인생에 다신 임신은 없다.’ 생각하며 산 송장처럼 침대에 누워 6개월을 보냈다.
임신 8개월 차, 입덧이 괜찮아질 때쯤 아는 분을 통해서 현재 내가 있는 연구실에 연구원을 구한다는 소식에 이력서를 넣었고, 일주일 만에 인터뷰가 잡혔다. 임신 전에 많은 곳에 이력서를 넣었는데, 단 한 곳도 인터뷰가 잡히지 않았는데, 이곳이 나의 자리였던 것일까? 모든 게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참고로, 캐나다 취업 사이트는 indeed (https://ca.indeed.com)이며, 연구 분야뿐만 아닌 모든 직종의 직업군의 취업 관련 공고가 올라온다. 또한 내가 경험한 캐나다의 취직은 의외로 인맥으로 많이 뽑는 걸 선호한다. 추천인, 추천서가 정말 중요하다. 그래서 대부분은 아는 사람 추천으로 뽑는 경우가 많다. 또 외국인보다는 자국민을 먼저 뽑게 거의 되어 있기에 (그 학교 출신 우선권, 그 지역 출신 우대) 사실 비자가 없는 외국인 연구원들은 불리한 건 사실이다. 비자를 준다는 것 자체가 학교에서도, 보스 입장에서도 많은 서류 작업이 필요하기에 불가능은 아니지만 쉽지는 않다. 캐나다에 먼저 들어와 워킹비자가 있거나 영주권이 있으면 훨씬 더 수월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인을 아는 보스라면 한국인이 근면 성실하다는 인식이 있기에 또 마이너스는 아니다. 어떤 보스는 캐네디언들은 게으르다는 인식이 있어 주로 외국인만 뽑는 연구실도 있다. 영어 잘하면 좋지만, 못해도 의사소통에 문제만 없으면 안 뽑을 이유는 없는 거 같다. 캐나다에서 살다 보니 한국 연구 수준이 높다는 걸 느낄 때가 많다. 기계도 한국이 더 좋은 최신식 기계를 쓴다. 물론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연구실 펀드마다 케바케겠지만 내가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해외취업이라고 해서 굳이 미리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엄청 두려워했었다.)
면접 때 겸손이 아닌 자신감 있게 보여야 한다. 사실 나는 영어 면접이 자신이 없어, 내가 먼저 질문들을 몇 개 만들어 갔다. 그럼 대화의 주도권이 나한테 있기 때문에 토픽의 주제의 영어 단어가 미리 예상되었기에, 발언하는 답변에 잘 반응만 하면 되었기에 조금 수월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어 면접을 엄청 걱정하며 혼자 예상 질문 만들며 영어 답변 외웠었다.
내가 면접 때 받았던 질문 중 생각나는 것을 몇 자 적자면,
‘왜 이 연구실에 지원했는지?’
‘그전에 내가 어떤 실험들을 했었는지?’
전공 관련돼서 정말 내가 실험했는지 안 했는지 떠보는 질문인지? 그냥 궁금해서 질문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질문들이 한두 개 있었다.
인터뷰 당일 10분 정도 인터뷰를 보고, 악수하며 잘해보잔다. 그저 은혜로 나는 그렇게 다시 연구를 다시 시작할 수가 있었다.
보스는 심지어 아기 낳을 때까지 기다려 주겠단다. 정말 그저 은혜였다. 언젠가, 보스에게 왜 날 고용했는지 물어보았다. 보스 왈 가끔 인생에 모험도 필요한 법이란다. 아기를 낳은 여자의 생활력은 강하다면서 그냥 자기 느낌을 믿었단다. 타지에서 이방인인 나는 그녀의 모험적인 친절을 입어 다시 연구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나 또한 그녀의 모험적 친절에 보답하고 싶고, 세상을 위해 ‘나’라는 존재를 사용하여 공헌하고 싶다.
그렇게 어쩌다 나는 아이를 낳은 지 7개월 만에 캐나다에서 첫 출근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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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Dalhousie university에서 포닥을 하고 있는 3살 엄마 오박사입니다. 서툰 엄마, 서툰 해외 직장 생활, 캐나다 일상의 에피소드들을 연재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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