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윤직원, <윤직원의 태평천하>)
“나는 대학원생답게, 생명끈을 줄여서 가방끈을 늘이고 있어.”
대학원생들 사이에 도는 오래된 농담이다 (짤도 있다!). 대학원 과정이 학위를 받는 일이니 가방끈을 늘이는 일이 되는데, 생명끈을 잘라 가방끈에 이어 붙인다는 뜻이다. 대학원 과정에서 건강을 챙기기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가 되겠다. 그렇다면, 대학원생들끼리 왜 이런 말들을 하게 되었을까. 대학원생들은 왜 아프게 되었을까?
연구실에 들어오고 처음 아파서 병원에 가게 된 건 손목 때문이었다. 갓 입학한 새내기 대학원생인지라, 10년이 넘은 길슨 사의 파이펫을 받아 실험하는 데 썼다. 길슨 사 제품을 써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엄지손가락으로 누르는 일이 힘들어지는걸. 나름 악력이 세다고 자부하던 나는 군소리 없이 그 파이펫을 쓰다가 결국 엄지손가락과 손목을 연결하는 부분의 인대가 늘어나버렸다. 볼펜 윗버튼 누르는 동작이 힘들 것이라는 의사선생님의 말에 차마 파이펫 때문이라고는 대답하지 못했다. 다행히 새 파이펫을 쓰던 선배가 졸업하면서 부드러운 파이펫을 물려받아 지금까지 쓰고 있다. 물론 지금도 가끔은 손목이 아프지만 말이다. 포닥을 갓 마치고 교수가 되신 어느 박사님은 손목 인대가 완전히 고장 나서 전자식 파이펫을 쓰신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이렇게 실험을 하다가 병을 얻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이 있다. 쥐를 이용해 실험하는 연구실 사람들은 이전까지 모르던 쥐털 알레르기를 발견하곤 한다(또는 새로 병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연구실에 들어와버려서, 연구가 너무 좋아서 알레르기약을 먹어가며 쥐를 만지고 동물실험을 한다. 예쁜꼬마선충을 연구하는 연구실에서는 매일 현미경으로 벌레들을 관찰하다 보니, 라식수술까지 한 눈의 시력이 급하게 나빠지기도 한다. 실험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들을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보며 지내니 사무직 직장인들이 가지는 목, 허리, 어깨 질환들을 함께 얻는 건 예삿일이 된다.
실험을 하다가 생기는 병들과 함께, 대학원생이 경험하는 많은 병의 원인은 스트레스와 과로다. 만병의 근원이라 불리는 그것들 말이다. 아픈지 전혀 모르고 살다가 마음먹고 건강검진을 했더니 역류성 식도염과 만성 위염이 발견되기도 하고, 이유도 모른 채 두드러기와 신경통으로 약을 먹을 일이 생기기도 한다. 어떤 친구들은 랩미팅 직후나 동물실에서 혼자 실험을 하던 중에 쇼크로 갑자기 쓰러지는 일도 있었다. 대부분의 병들이 병원에서 ‘스트레스 안 받고 푹 쉬면 나아요’라는 처방을 내리는 것들이다. 오죽하면 졸업한 선배들도 대학원만 졸업하면 몸이 씻은 듯이 건강해진다고 말할까?
한국 사회의 스트레스가 이미 위험한 수준인데, 대학원생의 스트레스는 뭐가 다를까 싶어 곰곰이 생각해 봤다. 대체 어떤 요소가 대학원생을 힘들게 만드는지 언어로 풀어볼 필요가 있었다.
교수님 또는 연구실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로 인한 스트레스는 차치하고라도, 학위 과정 자체가 주는 스트레스가 있다. 대학원 과정은 학부 때와 달리 목표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다. 모든 것은 내가 정해야 하고, 목표의 달성 여부는 내가 얼마나 잘 해내는지에 따라 달려있다. 하지만 연구에서 ‘잘 해내는 것’은 생각보다 많이 어려운 일이다. 연구 주제를 정하는 것부터 실험을 하는 것까지 일정 부분 운이 따르고, 실패는 생각보다 많이 일어난다. 반복하는 실패에 익숙해지는 것은 정말 힘들다. 실패를 쉽게 받아들이는 건 보살, 성인들이나 하는 것이고, 한낱 인간은 좌절할 수밖에 없다. 덕분에 우울을 얻기도 하고, 잠 대신 고민을 하며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실패를 복구하기 위해 집 대신 실험실에서 끝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 또한 당연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보상은 제대로 주어지는가? 학위 과정과 연구의 주된 보상은 아무래도 학위의 ‘명예’일 것이다. 오랜 꿈을 이루는 ‘자아실현’과 연구를 통해 인류에 조금이라도 기여한다는 ‘보람’도 있다. 그 외에는? 없다시피 하다. 적절한 보상을 스스로 부여하기에는 통장이 너무 가볍다. 연구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 가득 차 있으니 쉴 시간이 주어져도 쉬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고, 내 몸을 챙길 겨를은 당연히 없다.
대학원생의 건강을 관리하기 위한 제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첫 번째로 건강보험공단에서 주관하는 국민 전체 대상 건강검진이 2년에 한 번씩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학원생이 같이 살지 않는 부모의 피부양자로 등록되어 있어 제도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고, 내시경이나 초음파 등 꼭 필요한 정밀검사는 비용을 더 들여야 한다. 두 번째로 산업안전보건법에 의거한 특수건강검진이 있는데, 화학물질 등 유해인자로 인한 영향을 측정하고 질병을 예방하기 위한 목적이다 보니 미리 알아내기 어려운 질병들이 많이 있다. 특히 유해인자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 않는 스트레스 기반 질병들은 찾지 못한다. 결국 대학원생들은 직접 돈을 지불하고 건강검진을 하거나, 병원비에 대한 부담으로 병을 방치해버린다.
건강검진 제도 외에도 대학별로 시행하고 있는 몇 가지 제도들이 있다. 특히, 포항공대에서 전국 최초로 대학원생의 휴가 제도를 만든 지 1년이 지났다. (이와 관련한 글도 작년에 작성했었다.) 휴식은 건강을 관리하고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행위이기에, 많은 대학원생들이 휴가 제도를 잘 사용하고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직 제도 시행 1년간의 휴가 사용 통계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포항공대에서 운영하고 있는 학생의료공제회나 카이스트 캠퍼스 내에 있는 클리닉도 대학원생의 건강관리를 위해 오래전부터 운영되어 온 훌륭한 제도들이다.
학위 과정은 수년간 자기 자신을 쏟아부어야 하는 장기전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끝나 사회에 나가면 또 다른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원생은 더욱 건강할 필요가 있다. 매일 잠깐이라도 연구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시간을 가지고, 운동을 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등 본인의 건강을 위해 투자했으면 좋겠다. 아픈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병원과 친해지자. 아파도 쉬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일임을 잊지 말자. 생명끈은 줄이지 말고, 가방끈만 늘어나게 만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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