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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포닥 생존기: 늪에서 살아남기] 좌절감의 늪에서 살아남기
Bio통신원(김또또 (필명))
누군가 나에게 생명 과학 연구를 한마디로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묻는다면(포닥 수준에서), 나는 ‘씨름’이라고 답하겠다. 두 선수가 허리춤에 둘러 맨 샅바를 서로 붙잡고 팽팽하게 맞서다가 상대방을 넘어뜨려야 끝나는 그 씨름 말이다.
다양한 실험을 부지런히 그리고 수없이 반복하여 의미 있는 결과를 뽑아내기 위한 실험과의 씨름, 열심히 하고 싶은 나와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고 싶지 않은 나 자신과의 씨름, 매일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연구 논문과 정보와의 씨름, 하나의 프로젝트를 논문으로 완성시키기까지 희미하기만 한 무언가를 계속해서 뒤 쫓아야만 하는 그 연구 자체와의 씨름 등.
그 많고 많은 씨름에서 승승장구하여 시원하게 논문을 완성하는 분들도 많이 계시겠지만, 나의 연구 생활은 그렇게 승리만으로 가득 차지만은 않았다. 팽팽하게 맞선 끝에 결국 그 싸움이 패배로 끝나게 됐을 때 느껴지는 깊은 좌절감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운 순간도 있었다.
원하는 씨름 이미지를 찾지 못해 넣어본 팔씨름 이미지.
팔씨름도 팽팽한 긴장과 기싸움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사진출처: pixabay)
실험에 대한 좌절감
내가 포닥을 시작했던 1년 차에 ChIP-sequencing을 해야 되는 일이 있었는데, 그렇게 어려운 실험이 아니었음에도 그때 그 실험이 지독히도 되지 않아 매우 절망적이던 순간이 있었다.
어떤 날에는 한 달간 준비해놓은 세포가 이유를 모르게 갑자기 다 죽어버려서 150mm 30장의 plate를 다 버린 적도 있고, (일반 세포라도 30장의 세포는 상당히 많은 양인데, 굉장히 비싼 미디아를 사용하던 세포였기에 더 쓰라렸던 마음...) 또 어떤 날에는 항상 똑같은 조건으로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DNA shearing이 너무 안되어서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한 적도 있다. 세포도 멀쩡하게 잘 자랐고 실험 자체도 상당히 잘 진행되었지만 sequencing에 필요한 DNA 양보다 아주 조금 모자라서 쓰지 못하게 되어버린 세트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약간 중 2스러운 생각 같아서 조금 우습지만 그때는 진심으로 ‘신비로운 생명이 자신의 비밀을 알려주지 않으려 발악하는 것 같다’라는 말을 일기장에 적어 놓았을 정도로 그 실험 결과를 얻는 데까지 많은 고생을 했었다.
왜 안될까 왜 안될까... 한번 꼬이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안되는 실험... (사진출처: pexels)
연구에 대한 좌절감
내가 탁월한 연구 능력을 가지지 않아서 느끼는 좌절감일 수 있지만, 나는 내가 처음 연구를 시작했을 때보다 지금 연구라는 것이 더 어렵게 느껴진다. 내 이름이 1 저자로 나가는 논문을 처음으로 냈을 때 아 연구라는 것은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이제 알겠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박사 졸업을 하며 기나긴 학위과정이 끝났을 때도 어느 정도 이상의 논문은 이제 쉽게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논문을 한 편 더 내고, 또 한 편을 더 내보았지만 연구를 한다는 것은 나에게 여전히 어려움 그 자체이다. 박사 과정 때는 지도 교수님과 실험적으로나 전체 프로젝트 진행에 있어 디테일한 부분까지 함께 상의하며 연구를 진행했었는데, 포닥이 되고 또 연차가 올라가면서 내 연구에 대한 자율성이 많이 커진 지금은 내가 어떤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 해야 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내가 묻고 있는 질문은 정말 생물학적으로 중요한 질문인가? 혹은 학문적으로 중요할 뿐 아니라 임상적인 배경에서도 중요한 질문인가? 현재까지 이 분야에서 밝혀진 것은 무엇이고, 그 사이에 빠져있는 연결 고리는 무엇인지 계속 스스로 공부하고 물어야 한다. 또 솔직한 마음으로, 좋은 점수의 저널에 논문을 투고하기 위해서는 어떤 질문을 하고 어떤 사실을 밝히는 것이 더 학계에 큰 임팩트를 주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도 한다. 그리고 내가 묻는 질문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어떤 실험을 해야 하는지,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실험은 무엇인지, 좀 셋업 하기 어렵더라도 하게 되면 좋은 실험은 어떤 것이 있는지 스스로 질문하고 할 일을 결정해야 한다.
최근에 A라는 단백질이 B라는 과정에 관여하는 기전을 연구하는 프로젝트를 받게 되었는데, 아무리 실험을 해보아도 A는 B 과정보다는 C 과정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은 결과를 계속 얻게 되었다. 이제는 나도 연구실 짬밥을 좀 먹었기 때문에 PI에게 바로 C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보다는, 어느 정도 데이터가 쌓일 때까지 내가 원하는 실험을 따로 진행한다. PI가 기다리고 있는 B 과정에 관련된 실험도 당연히 계속 진행해서 데이터를 가져가야 하고, PI의 전문 분야가 아닌 C 과정에 대한 공부는 오롯이 내 몫이다.
이렇게 스스로 주도해서 하는 연구는 참 재미있고, 내가 생각한 가설에 따라 결과들이 착착 나와서 보란 듯이 데이터를 가져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가 생각한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는 일이 다반사이다. 그러면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일은 일 대로 공부는 또 공부 대로 열심히 해놓았지만 개인 미팅 시간에 그 데이터를 가져가 보여줄 수 없어 조용히 내 마음속에 묻어둔다. 다음에는 내가 생각한 가설이 맞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말이다.
커리어에 대한 좌절감
나는 사실 지금 두 번째 포닥을 하고 있다. 첫 번째로 가게 된 랩의 연구비 문제와 기타 복잡한 상황 때문에 랩을 옮기는 결정을 하게 되었다. 이 전 랩의 연구비 문제는 나의 능력과는 상관없는 문제였고, 이 전 랩에서 내가 하던 연구들은 운이 좋게도 다 잘 마무리되어 두 편의 논문을 낼 수 있었다. 이렇듯 객관적으로 최악의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랩을 옮기게 된 그 상황에 대한 당황스러움과 우울함을 이기기가 참 어려웠다.
이제 포닥을 시작한 지 수 년이 지나 동료 포닥들은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데이터들을 모아 논문을 쓰기 시작하거나 이미 완성하여 투고를 하는 시기에, 나는 낯선 환경에 가서 내가 잘 모르는 주제의 연구를 새로 시작했어야 했다. 처음 포닥을 시작한 새내기 포닥처럼 나를 대하는 PI와 우리 랩 동료들을 보면서 알게 모르게 큰 스트레스를 받았고, 나는 새내기 포닥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괜히 더 오버해서 일을 열심히 하곤 했다. 어느덧 논문을 마무리 한 주변 포닥 분들은 다음 스텝을 위한 지원을 하기 시작했고, 어떤 사람은 인더스트리 잡을 잡아 떠나고, 또 어떤 사람은 아카데미아에 교수가 되어 떠나는 것을 보면서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좋은 보상을 받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기쁘고 축하하는 마음이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만 뒤로 퇴보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진부하지만 좌절감과의 씨름이 나를 성장하게 한다
포닥을 하며 여러 어려움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내 나름의 해답과 해결책을 가지고 극복하려 애써왔는데, 아직까지도 해결책이 딱히 없는 것이 바로 이 좌절감의 늪이다. 아직도 나는 실험을 하며, 연구를 하며, 내 커리어를 생각하며 좌절감을 느끼고 고통받는다. 그러나 자기 계발서 같은 소리처럼 들릴까 봐 매우 조심스럽고, 진부하기 짝이 없지만 나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이런 좌절감과의 씨름이 나를 성장시킨다고 믿으며 힘을 내고 있다.
예전의 나는 실험을 느슨하게 (라고 쓰고 대충이라고 읽는다) 계획하고 실행해왔지만, 거듭되는 실패를 경험하면서 세포 관리나 실험 조건에 대해 더욱 엄격하고 치밀하게 계획 및 실행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예전보다 일관된 실험 결과를 더 잘 얻게 되었다. 연구에 있어서 PI가 제시하는 아이디어와 가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질문을 던지고, 내가 생각한 아이디어를 증명하려 애쓰다 보니 추가적으로 더 많은 실험과 공부를 했어야 했지만, 그로 인해 내 지식은 더욱 깊어졌고 내 프로젝트의 리더가 내가 되었다. 랩을 옮기는 것에 대해서 우울함을 느끼고 누구에게 터놓고 이야기하기 부끄러운 감정마저 느꼈었는데, 이 경험을 통해서 랩을 옮기는 것에 대해 고민하시던 한 박사님의 이야기를 공감하며 들어드릴 수 있었고, 랩을 옮기는 것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등의 작은 도움을 드릴 수 있었다.
어둡고 긴 밤이 지나면 눈부신 아침이 찾아온다. 꼭 그렇게 된다. (사진출처: pexels)
인생은 고통이라던 아버지 말씀을 떠올려본다. 인생은 대부분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지만 정말 행복하고 반짝이는 ‘순간’이 있는데 그 ‘순간’을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견디며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너무 염세주의적 시각일지 모르겠지만 인생을 살다 보면 정말 인생은 고통뿐인 것처럼 좌절감을 느끼는 시기가 있다. 하지만 긴 밤이 지나면 아침이 찾아오고, 추운 겨울이 끝나면 따스한 봄이 온다. 좌절감의 늪을 거치며 내가 좀 더 성장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더 이해할 수 있는 성숙함을 가지게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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