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에서 감자 키워 먹는 얘기!

이 문장 한 마디면 모두 영화 ‘마션’이 떠오르겠죠. 맷 데이먼 주연, 화성에 홀로 남겨진 이의 우주 생활기. 화성에서 실제로 감자를 키워 먹는 일에 대해 여러 이들이 과학적인 분석을 내놓기도 했죠. 아마, 다들 이 영화를 즐겁게 관람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지금껏 다룬 적 없었던 지구인의 생생한 생활감을 우주에서 느끼게 해줬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한 번쯤 궁금해했던, 하지만 물어보기에는 내가 너무 하찮아 보이는 그런 질문들을 픽션으로나마 생생하게 답변 받은 기분. 맷 데이먼의 역할에 찰떡인 연기 역시 한몫을 했겠지요. 원작 소설 ‘마션’ 의 첫 문장, “아무래도 X 됐다 (I’m pretty much fucked).” 은 이 소설과 작가의 위트를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런 작가의 신작 헤일메리 프로젝트는 지구에 갑작스레 닥친 재앙에 맞서는 이들, 그중에서도 최전선에 서 있는 인간의 지구 구조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입은 많이 순화되었지만, 근본적인 너드 감성과 비관적인 듯 낙관적인 위트는 여전합니다.

그런데 이 인간, 지금까지 봤던 지구를 구조하는 다른 인간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인간이 아닌 듯한 슈퍼히어로를 기대하는 시대는 지났지만, 보통 생각하게 되는 모습들 있잖아요. 엄청난 의지가 있다든지, 고집이 있거나, 부족하지만 사명감을 갖고 남을 위해 희생하려 하는 모습들. 하지만 주인공은 첫 페이지부터 자기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웅얼대며 등장합니다. 이 이야기의 주축 중 하나는 기억을 잃어버린 우주인 라일랜드 그레이스가 자신의 기억을 찾아가며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우주에서 진행되는 자아 찾기지요.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떴을 때 우주라면, 어떤 변화가 먼저 느껴질까요? 중력이 달라져서 몸을 가누기 힘들고, 창밖에 보일 광경들이 낯설고, 앞에 놓여 있을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고차원적인 과제들이 있겠지요. 우리의 주인공은 오랜 잠에서 깨어나서 기억의 조각들을 맞춰가며, 자신이 지구가 아닌 우주에 있고 어떤 상황이라는 것을 먼저 떠올려야만 합니다. 시체들과 나를 아기처럼 돌봐주는 로봇들, 그리고 실험실이 옆에 있다는 게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겠죠. 자기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한 인간이 너무나 이상한 몸의 움직임과 원래 알던 것과는 다른 감각에 자연스럽게 중력가속도를 계산해 이곳이 지구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과학자들이 이런 상황에 처하면 보통 똑같은 행동을 할 것 같네요.
지구의 생태계를 끝낼 수 있는 재앙은 뭐가 있을까요? 외계인의 지구 침공, 핵전쟁을 비롯해 다양한 대답들이 있겠지만, 가장 그럴듯하고 현재 진행 중인 것은 기후 변화겠지요. 하지만 이상기후가 어떤 변화를 일으키고,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매일 듣고 느끼고 있음에도 이를 진짜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많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 변화가 우리의 생애 주기 안에 급격하게 일어난다면 어떨까요. 한 20년 전후로? 갑자기 지구 멸망이 내 현실 속으로 들어옵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 생물인 아스트로파지는 빛을 에너지원으로 이용, 저장하고 이를 추진력으로 활용합니다. 또, 이산화탄소 분광 신호와 빛을 이용해 생애 주기를 조절하고, 특정 행성으로 이동해서 번식한 후 다시 다음 생애 주기를 위해 태양으로 돌아갑니다. 지금껏 우리가 발견해 본 적 없는 형태의 생명체지만, 일견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드는 우주 생명체지요. 이 생명체가 어마어마한 양의 빛 에너지를 저장하고 소비하기 때문에, 지구에 도달하는 태양 복사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고, 20년 후면 빙하기가 도래할 것이라는 관측 결과가 나옵니다.
이 재앙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전 세계가 힘을 합치고 우리의 주인공이 이야기 중심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분자생물학자였고, ‘물 기반 이론에 관한 분석과 진화 모델 예측에 관한 재평가’라는 논문에서, 생명체에 액체 형태의 물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학설을 제시하며 동료 과학자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preliminary study in field에 질타를 날린 후 학계를 떠난 (혹은 쫓겨난) 현직 과학 교사. 그 전적 덕분에 갑자기 범 지구적 재앙이 다가오는 현장에서,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우주 생명체를 동정하고 이 특성을 밝혀내는 역할을 최초로 맡게 됩니다. 게다가 우주로 떠나 지구를 구할 방법을 찾아올 선발대가 되어 버렸지요. 이 모든 것이 그레이스의 출중한 능력 때문이라기보다는, 최전선의 석학들을 먼저 투입했을 때 이들이 혹시 모를 아스트로파지의 위험성에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일어난 일들이라는 것이 작가의 위트 중 하나입니다. 주인공과 대척점에 서 있는, 전세계 모든 규제의 위에 있는 최고책임자 스트라트와 주인공의 행적 차이, 그리고 바늘로 찔러도 뚫리지 않을 것만 같은 스트라트에게서 엿볼 수 있는, 주인공과는 다른 종류의 고뇌 역시 인물을 매력적으로 만들어 주지요.
우주에서 자아 찾기가 이야기의 한 축이라면, 또 다른 축은 같은 재앙을 맞이한 동지와의 조우입니다. 지구에 위기를 일으키는 외계 생물체가 존재하는데, 지능을 가진 외계 친구가 존재하지 말란 법도 없지요. 아스트로파지 때문에 위기에 처한 모행성을 구하기 위해 우주로 탐색을 나선 에리디언 친구 로키. 둘은 광막한 우주에서 같은 목적을 갖고,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서로 비슷한 수준의 지능, 비슷한 수준의 문화를 갖고 있는 외계 생명체들끼리의 조우. 그리고 의사소통을 위한 서로의 외계어 배우기는 소소한 즐거움과 함께 감동을 줍니다. 그리고 서로의 행성을 구하기 위해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는 모습도요. 작가가 외계인의 입을 빌려 말하는 서로 간의 지능이 비슷한 이유와 서로를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 그리고 지구인의 입을 빌려 말하는 서로 간의 생체가 다른 이유도 꽤나 설득력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이야기의 결말이 신선했습니다. 추리소설에서 볼 듯한 반전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지구 구출기를 마무리할 수도 있구나 하는 즐거움이지요. 우리가 지금까지 보던 지구를 구한 영웅들의 말로와도 다른데, 주인공이 선택을 내린 인간적인 이유 역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작가가 보여주는 참신한 이야기의 전개도 그렇지만, 문장 역시 박진감이 넘치고 호흡이 늘어지지 않아 집중해서 이야기를 끝까지 따라가게 하는 큰 힘이 됩니다. 과학계에 몸을 담고 살아온 사람이 주변의 생활상을 적극 반영하여 SF를 썼을 때의 장점일까요? 단순히 말장난이나 공상으로 느껴지는 내용이 아니라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자료 조사들. 진짜 너드들의 사회에서 지내는 너드가 그려내서 더 생생한 인물의 모습. 평범하고, 말버릇도 다소 곱지 않고, 사회에 그다지 친절하지 않지만 내 과학에는 집요한, 그런 인물들이 등장해서 만들어나가는 이야기는 정말 우리의 모습과 가까운 것 같아 웃음이 나기도 하고, 조금 더 집중해서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게 해 주지요.
미드 빅뱅 이론을 보며 사람들은 등장인물들의 너드같은 (주변 현실 세계에 별로 없는) 모습에 재미를 느꼈다지만, 이과생들은 이들의 모습에 마치 고향에 온 듯 동질감을 느꼈다는데, 이 책을 보면 브릭 분들은 어떠실지 궁금합니다. (전공이 다른 제 친구는 정확히 위와 같은 반대의 의견을 이 책의 매력으로 꼽았습니다.) 작가 앤디 위어는 어린 나이부터 과학계 커리어의 패스트트랙을 타고, 프로그래머로 근무하며 소설을 쓰기 시작, 데뷔작 마션으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작품이 벌써 작가의 세 번째 작품인데요, 작가의 자평으로는 ‘완전한 SF로 진입하는 엄청난 한 걸음’이라고 합니다. 이미 라이언 고슬링 주연으로 영화화 결정, 크랭크인이 예정되어 있다고 하니, 영상으로 만나기 전 원작자의 이야기를 먼저 책으로 만나보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겠지요. 작가가 앞으로 보여줄 다른 세계들도 기대됩니다.
Ps1. 작가가 다루는 주제와 인물의 모습이 생각보다 다양합니다. 두 번째 작품 아르테미스 역시 속도감 있는 전개와 생생한 생활 묘사로 읽는 즐거움이 있는 소설이니, 앤디 위어의 작품들이 취향에 맞으신다면 추천드립니다.
작성자: 이지아
* 본 서평은 "BRIC Bio통신원의 연재"에 올려진 내용을 "이 책 봤니?"에서도 소개하기 위해 동일한 내용으로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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