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사례는 일반화해서 표현한 것이며... 제 이야기 아닙니다.
최근 국내 학회를 참관했습니다.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고 열린 가장 큰 학회였습니다. 개인적으로 학회는 대학원생 때 참여한 이후 4년 만이었니다. 코로나가 휩쓴 후에도 학회의 시간표나 구성은 그대로였지만, 학회에 참여한 목적이 달라진 덕에 전혀 다른 광경이 보였습니다.
연구원 시절 학회는 발표나 포스터로 최신 연구를 찾아 듣고, 부스 이곳저곳을 돌며 도토리 모으는 다람쥐처럼 실험 용품 샘플과 잡동사니를 챙겨 오는 곳이었습니다. 이번에 저는 과학보다 과학자에 집중하며 학회에 참여했고, 그런 관점에서 학회는 네트워크의 장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발표 직후 있는 질문 시간에 손을 드는 대신 세션이 끝난 후 직접 연구자를 찾아갔습니다. 일대일 자리에서는 연구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발표자에게 인사를 하는 줄의 맨 끝에서 기다리며, 학계야말로 제가 모르는 문화가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표지 출처 알라딘
질리언 테트의 <알고 있다는 착각>은 집단의 문화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설명하고 서로 다른 문화를 왜 알아야 하는지 소개하는 책입니다. 저자는 인류학자 출신의 언론인입니다. 저자는 박사 과정 때 구소련의 중앙아시아 오지에서 현장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되며 연구를 계속하지 못하고 언론사에 취직합니다.
글머에도 저자는 여타 언론인들과는 다른 시각에서 사건을 취재하고 기사를 쓸 수 있었습니다. 저자에게는 현장 연구에서 얻은 인류학적 시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금융계 사람들에게 답이 없는 질문을 던지고, 인터뷰를 할 때는 사람들이 ‘하지 않는 말’에 집중했습니다. 금융인들이 수많은 상품을 만들면서도 거래의 마지막 결과인 ‘현실 세계’는 외면한다는 사실을 눈치챘고, 그때부터 위기를 경계하자는 기사를 썼습니다. 저자의 예측은 2년도 되지 않아 2008년 금융 위기로 실현되었고요.
인류학은 인류의 기원이나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브릭 여러분이라면 올해 노벨상을 받은 스반테 페보의 연구에서 인류학이 익숙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페보의 자서전은 무척 재미있으니 지금도 추천합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는 문화인류학은 고인류학과는 다른 학문입니다. 사람은 살아온 환경에 따라 같은 사건도 전혀 다른 눈으로 보게 됩니다. 이러한 문화적 차이는 깨닫기 전에는 차이가 존재하는 지조차 알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문화인류학은 현장 조사와 비구조적인 질적 연구로 발전했습니다.
21세기, 오지가 사라진 인류에게도 인류학적 시각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사람이 모이면 새로운 문화는 어떻게든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이제 인류학 연구를 가장 많이 활용하는 곳은 기업입니다. 다른 문화권에 진출하는 상황부터 소비자 분석, 노동자들의 업무 성향 파악까지 기업은 다양한 곳에서 인류학을 활용합니다. 인류학자를 고용하기도 하고 방법론만 빌린 약식 연구를 하기도 하며 경영 전략을 세웁니다.

기업의 활용 예시. 스위스 기업 네슬레는 일본 문화를 연구하며
킷캣을 일본의 토속(?) 과자로 만들었습니다. 사진 출처 아마존
저자가 말하는 ‘인류학적 시각’이란 누구나 환경과 맥락에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각기 다른 문화적 틀 속에 있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사회에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목소리 대신 침묵을 찾아내라는 말은 어렵습니다. 책에 있는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어느 가전 업체에서 주부를 대상으로 세탁에 대한 설문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모두가 빨래는 하기 싫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나 설문조사 대신 그림 연상이나 인터뷰 등 틀이 없는 질문으로 다시 물었더니 ‘빨래는 하기 싫은 일이지만 남에게 맡길 수는 없는 일’ 이란 답을 얻습니다. 기업의 마케팅 전략도 '하기 싫은 일을 대신하는 것'을 떠나 새롭게 할 수밖에 없었고요.
브릭에 책을 추천하는 이유는 책을 읽으며 연구실이야말로 서로 다른 문화에 걸쳐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연구실의 구조는 책에 나온 다양한 기업의 경영진과 실무진 관계와 비슷합니다. 교수는 자기 방 학생들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모릅니다. 랩미팅에서 학생들의 역학 관계를 파악하긴 어렵고, 일대일 면담을 해도 솔직한 이야기를 듣기는 어렵습니다. 학생들도 지도교수가 어떤 네트워크 속에서 활동하는지 모릅니다. 이 책 한 권을 읽는다고 인류학적 시각이 생기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서로가 얼마나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짐작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알고 있다는 착각>은 전문적인 책도, 실용적인 책도 아닙니다. 흥미로운 사례만 가져와 인류학을 멋지게 소개하는 책입니다. 인류학적 시각을 가지라고 하지만, 어떻게 해야 인류학적 시각을 갖게 되는지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인류학은 잘 모르니 생물학으로 비유하자면 블록버스터 치료제를 보여주며 분자생물학을 소개하는 느낌도 듭니다.
책을 읽고 인류학 자체에 관심이 생겼다면 한국문화인류학회가 쓴 입문서인 <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이 있습니다. 20년 전에 나와 예시가 낡은 감이 있지만, 인류학이 어떤 학문인지 친절하게 알려주는 책입니다. 작년에 화제가 된 <개미는 왜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투자하는가?>도 인류학 전공자의 석사 논문을 다듬어 나온 책입니다. 전업투자가들의 주식 매매방을 현장 조사한 연구로, ‘오지가 아니라도 유용한 오늘날의 인류학’의 연장인 셈입니다. 학교에 다니며 아직 여유가 있는 분이라면 인류학 수업을 찾아 듣는 게 제일 빠를 거예요. 연구할 현장을 찾는 인류학도에게 여러분의 연구실을 소개해도 좋겠지요.

표지 출처 알라딘
작성자: 이지아
* 본 서평은 "BRIC Bio통신원의 연재"에 올려진 내용을 "이 책 봤니?"에서도 소개하기 위해 동일한 내용으로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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