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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N사피엔스] 멘델의 유전법칙과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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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N사피엔스] 멘델의 유전법칙과 재발견

2020.11.26 15:06
종의 기원: 1859년 11월 출간돼 인류의 세계관을 뿌리째 흔들어놓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사진제공 오클랜드박물관)
종의 기원. 1859년 11월 출간돼 인류의 세계관을 뿌리째 흔들어놓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오클랜드박물관 제공

1859년에 출간된 다윈의 《종의 기원》은 생물학 분야는 물론 과학 전체를 통틀어 보더라도 19세기 과학의 가장 위대한 성취라 평가할 만하다. 생물종이 다양하게 변화한다는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의 기원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인간이 '절대적 존재(The One)'의 지위에서 ‘그들 중 하나(One of Them)’의 지위로 내려온 것은 다윈 덕분이다.


다윈의 이론에서 진화가 일어나려면 꼭 필요한 요소가 바로 유전이다. 즉, 대물림되는 어떤 형질의 변화가 일단 있어야 한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이 올바른 진화이론으로 살아남지 못한 이유는 획득형질이 후손으로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에 유전이론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사실 ‘유전’ 하면 지금의 우리에게도 딱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스마트폰 앱 중에 남자와 여자 사진을 입력하면 이들의 아기가 어떤 모습일지 보여주는 앱이 있다. 구체적인 알고리즘이야 알 길은 없지만 대체로 아빠와 엄마를 반반씩 닮은 묘한 결과를 보여준다. 이처럼 ‘아빠와 엄마를 반반 닮는다.’는 이른바 융합유전론이 19세기에도 있었다. 진화론을 제시한 다윈 자신의 유전이론도 있었다. 이에 따르면 생물체의 각 세포마다 소분체(gemmule)가 있고 이 소분체가 생식세포로 모여 자손에게 전해진다. 이를 판제네시스 이론이라 한다.
 
그러나 올바른 유전이론은 주류 학계와는 거리가 좀 멀었던 오스트리아의 수도원에서 싹트고 있었다. 성 토마스 수도원의 신부였던 그레고르 멘델이 그 주인공이다. 멘델은 빈 대학에서 3년 동안 청강을 할 만큼 학구열도 대단했다. 멘델은 1854년 수도원 정원에서 34그루의 완두로 잡종교배 실험을 시작했다. 200회가 넘는 교배를 통해 1만 종이 넘는 잡종을 수확한 멘델은 자신의 결과를 정리해 뷔론 자연사 학회에서 발표했고, 《식물 잡종에 대한 실험》이라는 논문으로도 발표했다(1865).

 

멘델은 오스트리아제국(현 체코)의 브루노 수도원에 머무르며 1856년부터 1863년까지 완두를 대상으로 교배실험을 했고 이 결과를 1866년 논문으로 발표했다. 올해는 논문이 나온지 150년 되는 해다. 위키피디아 제공
멘델은 오스트리아제국(현 체코)의 브루노 수도원에 머무르며 1856년부터 1863년까지 완두를 대상으로 교배실험을 했고 이 결과를 1866년 논문으로 발표했다. 올해는 논문이 나온지 150년 되는 해다. 위키피디아 제공

 

멘델의 결과는 ‘멘델의 유전법칙’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세 가지가 있다. 제1법칙은 우열의 법칙이다. 모양이 둥근 순종의 콩과 모양이 주름진 순종 콩(이런 형질을 대립형질이라 한다.)을 교배하면 그 결과는 어떻게 나올까? 유전에 대한 막연한 느낌만으로 생각해 보자면 잡종1대, 즉 그 1대 자손에서는 적당히 반쯤 주름진 콩들이 나올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멘델은 전혀 엉뚱한 결과를 얻었다. 잡종1대의 콩들은 모두 둥글었다. 콩 모양만 특이하게 그런 걸까? 이번에는 색깔을 살펴보았다. 노란색 콩 순종과 녹색 콩 순종을 교배했더니 그 결과는 연두색 콩이 아니라 모두 노란색 콩이었다. 이 결과는 유전에 대한 우리의 융합유전론적인 예상과 전혀 다르다. 자손이 부모의 형질을 반반씩 닮는 게 아니라 어느 한 형질만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를 ‘우열의 법칙’이라 한다. 부모의 형질 중 잡종1대에서 표현되는 형질(둥근 모양, 노란색 등)을 우성형질, 표현되지 않고 숨어 있는 형질(주름진 모양, 녹색 등)을 열성형질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열성형질은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멘델은 잡종1대에서 얻은 완두콩끼리 교배해서 잡종2대에 어떤 결과들이 나오는지 살펴보았다. 그 결과 우성과 열성이 3:1의 비율로 나타났다. 잡종1대에서 숨어 있던 열성형질이 잡종2대에서 25%의 비율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것이 제2법칙인 분리의 법칙이다. 흔히 멘델의 법칙을 확인했다는 것은 잡종2대에서 우성과 열성형질이 3:1로 분리돼 나왔음을 확인한 것이다. 그런데 이 3:1이라는 비율은 참 낯설고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멘델은 잡종 후세대를 여럿 조사한 결과 여전히 3:1의 비율이 반복적으로 나타남을 확인하고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음을 직감했다.

 

멘델은 완두의 스물두 가지 형질 가운데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는 일곱 가지를 택해 교배실험을 했다. 사진속의 완두에 이를 적용해보면 둥근 콩과 부푼 콩깍지는 우성이고(주름진 콩과 수축된 콩깍지가 열성) 녹색 콩은 열성이다(노란 콩이 우성). 빌 에베센 제공
멘델은 완두의 스물두 가지 형질 가운데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는 일곱 가지를 택해 교배실험을 했다. 사진속의 완두에 이를 적용해보면 둥근 콩과 부푼 콩깍지는 우성이고(주름진 콩과 수축된 콩깍지가 열성) 녹색 콩은 열성이다(노란 콩이 우성). 빌 에베센 제공

멘델은 그럴 듯한 가설을 세워 이 결과를 설명하려고 했다. 생명체가 어떤 형질을 나타내는 것은 유전인자(훗날 유전자라 부름) 때문인데 이게 각 개체의 세포 속에 쌍으로 들어 있다. 하나는 아빠로부터 다른 하나는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이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분리돼 있고 (분리의 법칙) 자손을 만들 때 그중 하나가 자신에게서, 또 다른 하나는 배우자에게서 대물림된다. 자손이 아빠와 엄마로부터 하나씩 받은 유전인자는 두 개의 변이 형태(훗날 대립유전자라 부름)를 이루며 겉으로 드러나는 대립형질을 결정한다. 멘델은 서로 다른 변이 형태가 만났을 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하나의 변이 형태에 해당하는 형질이라 생각했다. 이것이 우성형질이다. 열성형질은 그에 상응하는 변이 형태가 둘이 모여야만 겉으로 표현된다. 이 원리에 따르면 우열의 법칙과 3:1 분리의 법칙을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 물론 멘델의 시절에는 아직 생식세포나 유전자의 개념이 정확하게 정립되기 전이었다.


멘델의 법칙을 아주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두 개의 변이형태를 문자로 표시하는 것이다. 가령 완두콩의 모양이 둥근 형질을 A, 주름진 형질을 a라 표시하면, 둥근 모양의 순종 완두콩은 AA로, 주름진 모양의 순종 완두콩은 aa로 표시할 수 있다. 이 둘을 교배해서 잡종1대를 만들면 잡종1대는 둥근 완두콩의 AA 인자 중 하나를 물려받고 주름진 완두콩의 aa 인자로부터 하나를 물려받는다. 즉, 잡종1대가 가질 수 있는 변이 형태는 Aa밖에 있을 수 없다. 그런데 A와 a라는 대립형질이 만나면 a는 발현되지 않고 A가 발현된다. 그러니까 A(둥글다)가 우성인자, a(주름지다)가 열성인자인 셈이다. 이렇게 Aa의 인자를 가진 잡종1대가 또 다른 Aa를 만나 잡종2대를 만들면 이제는 경우의 수가 더 많아진다. 아빠에게서 A나 a 두 가지를 받을 가능성이 있고 엄마에게서도 A나 a의 두 가지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잡종2대는 AA, Aa, aA, aa의 네 가지 가능성을 갖는다. 여기서 AA, Aa, Aa는 둥근 형질을 드러내고 오직 aa만 주름진 형질을 드러낼 것이므로 전체적으로 둥근 콩과 주름진 콩은 3:1의 비율로 나올 것이다.


제3법칙은 독립의 법칙으로, 서로 다른 두 개의 형질이 각각 독립적으로 유전된다는 내용이다. 예컨대 둥글고 노란 순종과 주름지고 녹색인 순종을 교배하면 콩의 모양과 색깔은 서로 독립적인 형질로 발현돼 각각이 잡종2대에서 3:1의 비율로 우열 형질이 드러난다. 콩의 색을 B(노란색)와 b(녹색)로 표시하면 둥글고 노란 콩은 AABB로, 주름지고 녹색인 콩은 aabb로 표현된다. 이 둘이 만나 잡종1대를 만들면 AaBb의 조합만 가능할 것이다. 이는 둥글고 노란 콩이다. 만약 이런 조합의 콩이 둘 만나서 잡종2대를 만들면 총 16가지(=4x4)의 가능성이 생긴다. 이 중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형은 둥근 노란색, 둥근 녹색, 주름진 노란색, 주름진 녹색의 네 가지 뿐이다. 16개의 조합 중 둥근 노란색은 9개, 둥근 녹색은 3개, 주름진 노란색은 3개, 주름진 녹색은 1의 비율로 나뉜다. 여기서 둥근 콩과 주름진 콩은 12(=9+3):4(=3+1)로서 결국 3:1의 비율을 보인다. 노란색과 녹색의 비율도 마찬가지이다.


멘델은 두 쌍의 대립형질뿐만 아니라 세 쌍의 대립형질에 대해서도 비슷한 실험을 했고 이 경우에도 각각의 대립형질이 서로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후대에 전해짐을 확인했다.


현실에서는 멘델의 세 가지 법칙이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는 경우도 많다. 특히 제1법칙이 그렇다. 형질 간의 우열이 명확하지 않으면 두 형질의 중간적 성질이 잡종1대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이를 중간유전이라 한다. 그래서 우열의 법칙은 ‘법칙(law)’의 지위에서 ‘원리(principle)’의 지위로 바뀌었다.


멘델의 유전법칙을 둘러싼 논란도 있다. 그의 수치 결과에 관한 것이다. 멘델은 완두콩의 개수를 일일이 세는 방식으로 자신의 데이터를 정리했다. 수치가 너무 정확하면 뭇 사람들의 의혹을 사기 마련이다. 20세기 현대통계학의 기초를 다진 로널드 피셔는 멘델의 결과를 조사해 인위적인 요소가 개입됐다는 결론을 내렸다. 윌리엄 브로드와 니콜라스 웨이드는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에서 “진짜라기에는 너무 정확한 통계 결과를 발표했다.”고 논평했다.


신념이든 선입견이든 미리 입력된 정보가 있다면 그 정보에 부합하는 데이터는 선택하고 부합하지 않는 데이터는 버리려는 압력이 부지불식중에도 작용할 수 있다. 아주 적극적으로 데이터를 조작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이런 식으로 계속 데이터를 수집한다면 그 결과는 결국 실험자가 원하는 이상치에 수렴할 것이다.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멘델은 여전히 유전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멘델의 법칙은 고전유전학의 출발점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멘델의 법칙은 멘델이 세상에 발표한 이래 35년 동안이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멘델이 학계의 주류에서 벗어난 아웃사이더였다. 사람들이 수도원 ‘식물 덕후’의 결과에 그리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리 이상하지는 않은 일이다. 오히려 학계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진화론에 쏠려 있었다. 멘델이 자신의 결과를 발표한 1865년은 《종의 기원》이 나온 지 불과 6년 뒤였다. 게다가 숫자를 세고 통계적으로 데이터를 처리하는 방식은 당시 생물학에서 전에 없던 방법이었다. 아마도 사람들은 멘델의 결과를 단순한 숫자놀음 정도로 치부했을지도 모른다.


멘델의 법칙을 다시 발견한 것은 1900년 세 명의 생물학자들이었다. 네덜란드의 휘호 더프리스, 독일의 카를 코렌스, 오스트리아의 에리히 체르마크가 그들이다. 더프리스는 패랭이꽃과 양귀비 등을 이용한 실험에서 멘델의 법칙을 확인했다. 더프리스의 결과를 두고 멘델의 공로를 자신이 가로채려 한 게 아닌가, 또는 표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다. 1900년 3월에 발표한 그의 논문에는 멘델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게다가 더프리스는 지금 ‘멘델의 법칙’이라 불리는 것들이 ‘더프리스의 법칙’이라 불리기를 원했던 모양이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독립적으로 멘델의 법칙을 재발견한 코렌스는 보다 양심적이었다. 멘델을 모른 채로 멘델의 결과를 얻었던 코렌스는 논문을 준비하며 문헌을 찾아보던 중 멘델의 연구결과를 마주했다. 이미 멘델이 한 일을 알고 있던 코렌스는 1900년 더프리스의 논문을 받아보고 더프리스가 멘델의 공을 가로채려 한다고 주장했다. 멘델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더프리스가 멘델이 쓴 용어를 그대로 쓰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코렌스는 자신과 더프리스의 성과뿐만 아니라 멘델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했다. 더프리스도 끝내 멘델의 업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 명 중 가장 젊은 체르마크는 멘델과 마찬가지로 완두콩으로 실험해 멘델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체르마크는 자신의 결과를 정리하던 중 멘델의 논문을 알게 되었고 1900년에는 더프리스의 논문도 받아보았다. 시간적으로 체르마크가 가장 늦게 논문을 발표했지만 그 시차는 석달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경우 누군가의 연구 결과가 다른 사람의 연구에 영향을 줄만큼 충분한 시간이 없었으리라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들 셋은 멘델 법칙의 재발견자로 불린다.
멘델의 업적이 널리 알려진 데에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생물학자인 윌리엄 베이트슨이 큰 역할을 했다. 일화에 따르면 베이트슨은 1900년 5월 왕립원예협회에 강연하러 가기 위해 케임브리지에서 런던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멘델의 법칙과 관련된 논문을 읽고 원고를 수정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열렬한 ‘멘델주의자’가 된 베이트슨은 멘델의 법칙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다녔다. 베이트슨은 새로운 용어와 개념을 도입해 멘델의 이론을 보다 쉽고 정확하게 정리해서 유포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베이트슨은 유전학이라는 말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해가 1905년이었는데, 이때 이미 베이트슨은 인간이 인간의 유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가능성까지 내다보고 있었다. 이 해에 조선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잃었다.

 

※참고자료

-싯다르타 무케르지, 《유전자의 내밀한 역사》(이한음 옮김), 까치
-쑨이린,  《생물학의 역사》(송은진 옮김), 더숲

 

※필자소개 

이종필 입자이론 물리학자.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교양과학을 가르치고 있다. 《신의 입자를 찾아서》,《대통령을 위한 과학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아주 특별한 상대성이론 강의》, 《사이언스 브런치》,《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을 썼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을 옮겼다. 한국일보에 《이종필의 제5원소》를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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