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실험은 익숙해지는 데 품이 든다. 자전거를 처음 타려면 연습이 필요한 것처럼, 실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자전거의 경우 혼자 연습하는 것보다 누군가 타본 사람과 함께 연습하면 더 빠르게 탈 수 있다. 실험을 하는 이들도 실험 방법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글을 보는 것보다, 실제로 그 실험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을 찾고는 한다. 실험을 하는 사람의 어떤 습관이 실험 결과에 많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습관은 대개 글에는 적혀 있지 않다. 사실 실험하는 당사자도 잘 모르는 경우가 있다.

생명과학을 전공한 나는, 대학교 및 대학원 수업을 통해서 생명 현상과 작용 원리를 두루 배웠다. 그 원리에 이르기 위해 설계한 실험에 대해서도 배웠다. 그렇다고 해서, 글로 배운 실험을 직접 해보라고 한다면 아마 실패할 것이다. 교과서에 실험 과정이 적혀 있다 한들, 직접 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라마다 다르지만, 대한민국의 대학원 석사과정은 2년, 박사과정은 5년 정도이다. 영국은 석사과정이 1년, 박사과정은 4년이다. 이 기간 동안 이공계열에 속한 많은 이들이 열정을 쏟으며 밤낮없이 새로운 실험 기법을 배우고 익히는 데 몰두한다. 글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실험을 먼저 해 봤고, 그에 익숙한 숙련자가 옆에 있는 것이 큰 영향을 미친다. 숙련자에게 배우면 몇 주면 될 일이, 혼자서 배우면 몇 달이 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험실을 꾸려 나가는 교수보다는 앞서 입학한 대학원생, 혹은 박사후연구원이 그런 숙련자 역할을 주로 한다.

하지만, 교육받는 단계에 있는 대학원생과 박사후연구원이 이런 숙련자 역할을 맡는 것을 당연하다고 볼 수는 없다. 박사 학위 취득과 함께 떠날 대학원생, 그리고 비정규직으로 짧은 기간 동안만 해당 실험실에서 근무할 박사후연구원이 숙련자 역할을 한다면, 계속해서 숙련자를 숙련시켜야 하는 모순에 이르기 때문이다.

내가 속한 영국의 연구 단지에는 연구 전문가(research specialist)가 곳곳에 있다. 테크니션이라고도 불리는 이들이다. 실험에 쓰이는 기본적인 재료를 만들어주는 이들부터, 각종 현미경을 다루는 현미경 팀 등 분야도 다양하다. 아주 오랜 기간동안 이 일을 해온 이들은, 그 어떤 대학원생이나 박사후연구원보다 해당 작업에 대한 숙련도가 높다. 그래서 여러 가지 변수가 있는 실험 과정에서 변함없는 상수를 제공한다.

영국 과학위원회에서 만든 ‘테크니션을 위한 약속'은 ▲가시성 ▲인정 ▲경력 개발 ▲지속 가능성 등 4가지 주제로 나뉜다./출처=Technicians make it happen 홈페이지
영국 과학위원회에서 만든 ‘테크니션을 위한 약속'은 ▲가시성 ▲인정 ▲경력 개발 ▲지속 가능성 등 4가지 주제로 나뉜다./출처=Technicians make it happen 홈페이지

영국 과학위원회(Science Council)에서는 비교적 최근인 2017년부터 ‘테크니션을 위한 약속(Technician Commitment)’을 만들었다. 이에 영국 내 많은 대학, 연구소 등이 이에 동참하였다. ‘테크니션을 위한 약속’은 크게 4가지 주제로 나뉜다. 첫 번째는 ‘가시성 (Visibility)’이다. 연구소 내에서 일하는 테크니션들을 음지에서 과학자들을 위해 일하는 이들로 보지 않고, 이들의 역할이 더욱 잘 보이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테크니션이 아니라 ‘연구 전문가’라는 직업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가장 높은 숙련도를 자랑하는 이들이 전문가가 아니라면 누가 전문가이겠는가.

두 번째는 ‘인정(Recognition)’이다. 연구 전문가들이 연구에 미치는 영향을 인정하고, 이들이 한 연구소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연구소 밖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세 번째는 ‘경력 개발(Career development)’이다. 지금껏 단일 직군으로서 승진의 가능성이나 경력을 더 키워나갈 여지가 적었던 것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연장선상에서 ‘지속 가능성(Sustainability)’을 말한다. 즉, 테크니션이 될 후속 세대를 양성하는 것이 마지막 주제다. 결국, 테크니션을 연구소 및 대학 내의 한 전문 직종으로 확립하자는 것이 ‘테크니션을 위한 약속’의 목표이다.

테크니션이라는 연구 전문가를 더 많이 양성하고, 이들의 경험과 숙련도를 더 널리 인정해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들을 고용할 때 부침이 심한 개인별 연구비에 의존하지 않고, 대학이나 연구소 단위의 기금 조성을 활용하는 등 여러가지 제도적 보완이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 한 가지 분야를 혹은 몇 가지 실험을 오랫동안 한 이들의 경험을 더욱 제대로 대우하는 환경이면 좋겠다. 그렇게 해서 적어도 5년, 많게는 7년 이상을 대학원에서 보낸 이들의 경험이 학계에 마땅한 자리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사라지는 일이 줄었으면 좋겠다. 대학원 과정을 거친 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학원에 가지 않아도 과학을 하고 싶은 이들이 이런 경로를 통해 함께 과학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저작권자 © 이로운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