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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배터리 다음은? 신약 개발에 미래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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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채인택
채인택 기자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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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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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가 모진 시련기를 맞고 있다. 기름값이 뛰면서 채솟값·고깃값·해산물값 할 것 없이 온통 들썩인다. 금리는 오르고, 주가는 곤두박질치며, 원화 환율도 뚝뚝 떨어진다. 주택·결혼·생활·사업 자금을 빚낸 사람들과 수출·수입 업체를 중심으로 주름살이 늘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처음 겪는 거센 풍랑이다.

대부분 바깥에서 찾아온 격랑이라 우리의 의지로 통제할 수 없어 더욱 문제다. 포스트 팬데믹 상황이 부른 인플레이션 진정을 위한 미국 연방준비(Fed)의 금리 인상, 국제전 성격이 뚜렷해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연속으로 내미는 보호무역 정책까지 악재가 줄을 잇는다.

한국 경제를 떠받쳐온 거대 기둥인 반도체·자동차 산업에도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바이든 미 대통령이 8월 9일 서명한 ‘반도체와 과학법’은 한국 반도체 업체의 대중국 시설투자를 막았다. 이는 대중 반도체 수출 둔화로 이어질 수 있다. 8월 12일 서명한 바이오 행정명령은 한국 업체의 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과 다국적 제약사의 한국 투자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

한국의 차세대 먹거리로 떠올라
코로나 백신으로 경제효과 입증
글로벌 보호무역 장벽 이겨내야
국가 차원 장기적 전략·지원 필요

신약 개발 원탁토론회 열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왼쪽에서 셋째)이 8월 16일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한 펜을 조 맨친 상원의원에게 주고 있다. [AP=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왼쪽에서 셋째)이 8월 16일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한 펜을 조 맨친 상원의원에게 주고 있다. [AP=연합뉴스]

8월 16일 서명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한국 전기차에 대한 차별대우로 대미 수출에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 한국 관리들이 워싱턴을 찾고,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서울을 방문한다 해도 이미 의회를 통과한 법을 되돌리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한미동맹 강화’라는 정치 레토릭만으론 내 돈이 걸린 경제문제, 특히 유권자의 표심을 자극할 수 있는 무역 문제의 파도를 넘기가 쉽지 않다. 방위산업이나 원자력발전소가 주목받는다지만 한국을 ‘먹여 살릴’ 정도는 아니며, 국제사회에서 여전히 논쟁적인 분야라는 한계도 있다.

이제 한국은 반도체와 자동차·배터리를 이을 경제 기둥을 자체적으로 찾을 수밖에 없다.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과학기술·지식기반의 새로운 미래 먹거리를 발굴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신약은 성장률과 시장점유율이 모두 높은 ‘스타상품’에 해당한다. 혁신 신약 개발은 한국 경제를 이끌 새로운 견인차로 손색이 없다. 미국과 영국·독일 등 과학기술 강국들이 국가과학기술 역량을 총동원해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하면서 얼마나 많은 경제적 이익과 함께 국가적인 자부심을 높였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과학기술한림원(KAST·원장 유욱준)이 26일 서울 양재동 엘타워에서 개최한 ‘신약개발 새로운 패러다임’ 주제의 제201회 원탁토론회는 한국의 미래 먹거리 전략과 관련한 과학기술을 조망할 기회였다. 이날 ‘오믹스 데이터 기반 혁신신약 개발’(김성훈 연세대 약대 교수), ‘인공지능(AI) 기반 혁신신약개발’(최선 이화여대 약대 교수), ‘마이크로바이옴을 활용한 혁신신약개발’(김규원 서울대 약대 명예교수) 등 첨단기술이 소개됐다. 오믹스는 유전체와 관련해 분자 수준에서 나온 다양한 정보를 활용하는 기법이며, AI 기반 신약개발은 방대한 작업·시간·자금이 필요한 후보물질 선별에 인공지능(AI)을 활용하는 기술이고, 마이크로바이옴은 미생물 대사산물 등을 활용한 의약품과 식품 개발을 가리킨다.

이날 확인한 희망은 이런 첨단기술을 활용한 융합형 혁신신약 개발이 한국에서도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극복할 과제도 숱하게 지적됐다. 사회를 맡은 문애리 덕성여대 교수는 “신약은 하나 내놓으면 상당 기간에 걸쳐 매년 조 단위의 매출을 올릴 수 있지만, 연구비가 평균 1조원 정도 들며 10~15년 개발 기간이 필요하다는 점이 한계로 꼽힌다”고 지적했다.

김성훈 교수는 “연구 성과가 산업계로 연결되는 과정의 간극을 가리키는 ‘데스밸리’가 여전히 문제”라며 “당장의 주가나 실적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기업이 장기적인 투자가 필요한 신약개발에 투자하기란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국가가 공적 제원을 동원해 장기적이고 지속적이며 전략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토론 좌장인 정해영 부산대 약대 석학교수는 “한국에 혁신신약 개발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며 “연구자들이 실패에 주눅 들지 않도록 하는 도전 시스템을 마련해 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제약 강국 벨기에의 혁신 사례

연구 시스템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잇따랐다. 유욱준 KAST 원장은 “한국이 연구비 30조를 지출하지만, 선택과 집중 전략이 필요하다”며 “과학자들이 아무런 대가 없이 자유롭게 연구하는 환경을 제공해야 하며, 한국은 이제 그 정도의 여유는 갖췄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토론자인 서울대 의대 김정훈 교수(안과)는 “새로운 연구에 대한 과감한 지원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예로 한국은 일본이 연구용 유전자 복제 원숭이를 20여 마리나 만든 다음에야 관련 연구비를 지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연구개발(R&D) 투자의 13.5%, 관련 종사자 소득의 80%, 제약업체 혁신이익의 80%를 공제해주는 제약 강소국 벨기에의 세금 혜택을 통한 신약개발·제약산업 육성 전략도 소개됐다.

혁신 신약을 한국에서 개발해 미래 먹거리로 키우려면 연구자와 제약사·바이오사의노력은 물론, 국가의 전방위적이며 거시적인 지원 전략이 필수적이다. 그래야만 한국의 과학기술이 시대를 뛰어넘는 도약을 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혁신 신약개발이 가능할 것이다.